목회와 신학/영성

‘무덤’(막벨라 굴): 약속의 땅에서 먼저 얻은 것 * 말씀: 창세기 23장 4절 사라가 죽었다. 약속의 여정은 멈추지 않았지만, 사람의 숨은

ree610 2026. 1. 22. 09:48

‘무덤’(막벨라 굴): 약속의 땅에서 먼저 얻은 것
* 말씀: 창세기 23장 4절

사라가 죽었다. 약속의 여정은 멈추지 않았지만, 사람의 숨은 멈춘다. 창세기 23장은 믿음의 가장 낯선 자리, 장례의 자리에서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눈물로 사라를 애도한다(창 23:2). 그런데 성경은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곧바로 ‘소유권’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간다. 눈물과 계약서, 애도와 법적 절차, 이 낯선 결합이야말로 믿음의 실체를 드러낸다. 약속의 땅에서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소유하게 된 것은 집도, 밭도, 제단도 아니라 ‘무덤’이었다. 이 역설은 우리 신앙을 단숨에 현실로 끌어당긴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 23:4)

1. '나는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창 23:4).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주인이 아니라, 보호가 필요하고 경계선에 선 존재라는 뜻이다. 믿음은 때때로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로 현실을 건너 뛰려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정반대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정한다. 신앙은 자기 과장이 아니라 자기 인식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먼저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배운다.

2. 슬퍼하면서 슬픔에 매몰되지 않기

이 장면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브라함이 슬픔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슬픔에 휩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사라를 위하여 충분히 애통한다. 그리고 즉시 헷 사람들에게 나아가 ‘매장할 소유지’를 요청한다. 이것은 임시로 빌리는 자리가 아니다. 법적으로 분명한 소유권을 얻는 자리다. 공짜는 달콤하지만, 때로는 관계를 비틀고 미래의 분쟁을 남긴다.

신앙은 눈물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눈물이 윤리를 무너뜨리지 않게 붙든다. 어떤 사람은 상실 앞에서 관계를 찢고, 어떤 사람은 말이 거칠어지고, 어떤 사람은 계산이 흐려진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장례가 신앙의 시험대임을 안다. 그래서 그는 더 조심한다. 더 정중하고 더 투명하다. 믿음은 평온한 날의 노래가 아니라, 무너진 날의 태도다.

3. ‘이미와 아직’의 신학

왜 하필 무덤이 첫 소유인가? 성경은 일부러 그렇게 배치한다. 약속은 받았으나 아직 다 소유하지 못한 삶, 이것이 아브라함의 자리다. 약속은 확실하지만, 현실은 더디다. 그래서 믿음은 선언만이 아니라 참고 기다리는 ‘견딤’이 된다.무덤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현실이다. 그 현실 앞에서 아브라함은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다. 동시에 약속을 핑계로 현실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는 작은 땅을 얻는다. 무덤은 끝을 말하지만, 이 무덤의 매입은 ‘약속이 계속될 것’을 증언한다. 믿음은 죽음 앞에서 약속을 잃지 않는 능력이다.

아브라함이 산 무덤은 ‘죽음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지만, 복음은 더 깊이 들어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을 비우는 복음’을 열어 보이셨다. 아브라함의 첫 소유가 무덤이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최종 소유는 무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말씀한다. 무덤은 영원의 주소가 아니라, 부활로 넘어가는 문턱일 뿐이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창세기 23장은 단지 장례 예절의 교본이 아니다. 부활 신앙의 바닥을 다지는 토대다. ‘약속의 땅에서 먼저 얻은 것은 무덤’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울한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도 약속을 놓지 않는 믿음의 확인이다. 상실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 그 사람이 약속의 사람이다.

** 기도문

나그네의 하나님,
상실의 밤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소서.
눈물 속에서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소서.

이 땅의 주인처럼 움켜쥐는 교만을 내려놓고, 나그네의 겸손을 입게 하소서.
공짜의 유혹을 이기게 하시고, 정직한 절차와 깨끗한 손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나 빈 무덤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오늘도 길 위에서 더 정중하고 성실하고 사랑하며 걷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