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담의 형상을 넘어 그리스도의 얼굴로! – 거울 앞에 선 인간 -
* 말씀: 창세기 5장 1-3절
아침에 거울 앞에 서면 우리는 먼저 피부의 주름과 표정을 본다. 그러나 조금만 더 머물면, 거울은 얼굴 너머의 실존을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본문은 바로 그 근원적인 질문을 품고 있다. 창세기 5장은 창조의 찬가가 역사라는 거친 땅에 뿌리내리는 장면이다. 타락한 인류에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이름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의 기록이다.
1. 하나님의 형상에서 자기 형상대로
창세기 5장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라는 표제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다(1절). 이 본문은 우리가 창조주의 현존을 드러내는 존재임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의 능력이며 사랑의 책임이다.
그런데 3절에서 문장은 미묘하게 뒤집힌다. “아담은…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이제는 ‘인간의 형상’대로 자녀를 낳는다. 부모는 자녀에게 밝은 면만 남기지 않는다. 말투와 표정뿐 아니라 미처 해결하지 못한 두려움, 분노의 방식, 상처의 방어 기제까지도 전수한다.
'나와 너'의 관계가 깨진 자리에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스며든다(마틴 부버). 타락 이후의 인간은 여전히 형상을 지녔으나, 그 형상은 깨진 거울처럼 빛을 왜곡하여 반사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아담의 형상’이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실존의 비애이다.
2. 단절되지 않는 은총: ‘셋’(Seth)을 세우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를 끊지 않으신다. 아벨이 죽고 가인의 폭력이 세상을 장악한 듯 보이던 순간, 하나님은 다른 씨인 셋(Seth)을 세우신다. ‘셋’이라는 이름은 “대신 세우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이는 죄의 연쇄 고리 속에서도 예배의 계보를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신실하심이다.
창세기 5장의 족보가 ’죽었더라‘를 반복하는 것은 냉혹한 현실 인식이다. 그러나 그 반복 속에서도 ’낳았다‘라는 생명의 사건은 멈추지 않는다. 셋의 계보는 폭력 문명 한가운데서 대안을 살아내는 ‘거룩한 남은 자’의 공동체이다. 깨진 거울 조각들 사이로도 은총의 빛은 스며들어 다음 세대를 이끈다.
3. 형상의 완전한 얼굴, 예수 그리스도
본문의 질문은 결국 한곳으로 수렴된다. “누가 이 깨진 형상을 온전하게 하는가?”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른다(골 1:15). 아담은 형상을 닮은 존재였으나, 그리스도는 형상 그 자체이시다.
우리의 소망은 참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가 새로워진다는 복음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자녀에게 아담의 흔적을 남기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 흔적은 저주가 아니라 은혜의 통로로 변모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실제이며 성화의 신비이다.
오늘 우리는 ‘아담의 실패’를 묵상하기보다 ‘그리스도의 완성’을 묵상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을까? 십자가라는 거울 앞에 서서 우리의 얼굴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거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정적인 유산을 '숙명'이라 부르는 것을 멈추게 하는 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계보가 시작되었음을 믿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기도록 초청받는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우리 몸과 마음을 정중하게 대하는 것은 창조주께 드리는 예의이다. 또한 이웃에게서 아담의 허물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먼저 알아보는 것, 그리고 축복의 한 마디를 건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의 족보를 이기는 생명의 서사를 예수님과 더불어 새롭게 써 내려가는 우리 삶이 되기를 기도한다.
** 기도문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
깨진 우리의 형상 속에도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그리하여 내 안의 상처가 죄의 반복이 되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이 우리의 말과 표정, 그리고 삶이 되게 하소서.
우리 자녀와 이웃 안에서 아담의 그림자보다
하나님의 형상을 먼저 보게 하소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담대히 증거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