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영성

“요 (못된) 나!”: 작은 아낌에서 큰 아낌에로 * 말씀: 요나서 4장 10-11절 성경 속에는 웃음을 머금지 않고는 읽기 어려운 장면이..

ree610 2025. 11. 25. 12:34

“요 (못된) 나!”: 작은 아낌에서 큰 아낌에로
* 말씀: 요나서 4장 10-11절

성경 속에는 웃음을 머금지 않고는 읽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책이 바로 요나서다. 하나님은 위엄의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가장 품격 있게 건드리는 유머를 사용하신 분이다. 요나서는 그 유머의 결정판이다. 요나는 죽겠다고 할 만큼 분노하고, 하나님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질문 하나를 던지신다. 그리고 요나는 선생님 앞에서 논리적이며 감성적 허점을 찔린 학생처럼 조용히 침묵한다. 웃기지만 아프다. 아프지만 멋지고 아름답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0-11)

1. 요나가 아끼는 박넝쿨

요나의 분노는 박넝쿨 한 그루에서 시작된다. 심지도 않았고, 기르지도 않았고, 노동도 없었다. 하지만 뜨거운 볕에서 고생하는 자기에게 그늘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요나는 그것을 아꼈다. ‘아끼다’는 감정적인 불쌍히 여김이 동반된 동사이다. 이 장면은 인간의 심리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포착한다. 우리는 ‘소유한 만큼’이 아니라 ‘익숙한 만큼’ 사랑한다. 요나에게 박넝쿨은 생명줄이 아니라 단지 감정의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요나는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그런데 이때 등장하시는 하나님의 태도가 압권이다. 요나를 꾸짖지 않으신다. 폭로도 없고, 징계도 없다. 대신 살짝 장난기 섞인 질문 하나를 던지신다.
“네가 박넝쿨을 아꼈거든… 내가 어찌 니느웨를 아끼지 않겠느냐?”

2. 대답 할 수 없는 질문

하나님의 질문은 논리적 반박보다 훨씬 강력한 방식이다. 어떤 질문은 답하기보다 침묵하게 만든다. 요나는 대답을 잃는다. 사실상 하나님의 질문이 요나 내면의 세계를 무너뜨린 것이다. 요나의 아낌은 자기 보호였고, 하나님의 아낌은 생명 보존이었다. 요나는 하루살이 박넝쿨의 그늘을 붙잡았고, 하나님은 한 도시의 생명을 품으셨다. 같은 단어 ‘아끼다’이지만, 전혀 다른 우주다.
하나님의 질문이 지닌 유머는 요나를 웃기려는 유머가 아니다. 요나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하는 존재론적 유머다. 요나 스스로 ‘요 (못된) 나’임을 자각할 수 있도록.
인간은 진지할수록 스스로를 과대평가한다. 하나님은 그 진지함을 공격하는 대신, 웃음을 통해 객관성을 찾게 하신다. 그래서 요나서는 코미디가 아니라 대단한 신학적 철학이다.
요나서의 위대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낌은 사람만을 향하지 않는다. 성경은 마지막 문장에 조용히 동물을 끼워 넣는다.
“…거기에는 12만 명과 짐승들도 많이 있지 않느냐?”
그것은 단순한 생태적 언급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낌은 인간 => 도시 => 민족 => 창조 세계 전체를 향해 확장된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번 웃고, 그 웃음 속에서 다시 멈칫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요나에게만 던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이기 때문이다.

3. 참된 아낌에로의 초대

나는 무엇을 그렇게 아끼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서면 우리의 아낌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아낌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더 크고 깊은 아낌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요나서의 마지막 절은 구원론이나 심판론을 말하는 장면이 아니라, 신론을 재정의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을 ‘우리 편의 하나님’으로 축소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하나님은 보편적인 긍휼로, 창조적 사랑으로 다시 확대하신다. 그리고 드디어 기독론에서 그 그림이 완성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니느웨보다 더 멀리 더 높이 올라간 하나님의 아낌이다. 요나에게는 원수에 대한 아낌이 불편했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위해 기꺼이 죽으셨다. 예수님이 벌린 십자가의 두 팔은 하나님의 아낌의 지평을 최대로 확장한 선언이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결국 요나서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요나의 작은 아낌에서 하나님의 큰 아낌에로.”
신앙의 성숙은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감정의 확장이다. 신앙의 깊이는 영적 포용력의 반경에 있다. 하나님이 웃으신 이유는 요나를 비웃기 위함이 아니다. 요나 안에 있는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 요나처럼 할 말을 잃는다. 그러나 그 침묵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너무 큰 초대를 받기에 멈춘 침묵이다.

“얘야, 네 아낌을 내려놓고, 이제 내 아낌 안으로 들어오너라.”

* 기도문

인간을 아끼시는 하나님,
내 작은 아낌을 더 사랑하며,
주님의 마음을 놓친 죄를 용서하소서.

요나를 책망하며 살았으나,
참으로 나 자신이 ‘요 (못된) 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리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내 아낌에서 하나님의 아낌에로 돌아서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