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산책: 임진왜란 당시의 휴전협상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기를 바랐으므로 적절한 명분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조선과 명나라 측에 여러 가지 요구 조건을 내세웠으나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종전 협상은 1596년 초겨울에 실패로 끝났다.
* 평화협상
명나라와 일본의 협상은 1593년 연초부터 시작되었다. 명나라 군대가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로, 그때 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군대는 개성으로 물러났는데 군량마저 바닥났다. 조선은 명나라 군대를 지원하느라 열심히 식량을 끌어모았으나 4만 명의 병사를 먹일 식량을 구하지 못하였다. 유성룡의 《징비록 (懲毖録)》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이여송 제독의 휘하 장수들은 군량이 없으므로 군대를 철수하는 것이 옳다는 말로 이여송을 압박했다. 그러자 그는 무능한 조선의 조정을 성토하고 유성룡 등을 불러놓고 큰소리로 꾸짖고 욕했다.
그해 3월, 명나라 군대는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식량창고를 불태웠다. 이에 춘궁기의 궁지로 내몰린 일본군은 이여송에게 휴전협상을 제안하였다. 笠谷和比古・黒田慶一, 《秀吉の野望と誤算》, 文英堂, 2000年.
명나라는 내심 반색하며 심유경(沈惟敬)을 협상 대표로 보냈다. 양쪽 모두 보급 문제로 애로를 겪고 있었던 데다 전황이 어느 한 편에 유리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협상할 뜻이 있었다. 조선에 주둔 중인 명나라 군대는 이미 4만 명을 넘었으나, 북부 지방에는 전염병이 심했다. 두 나라 진중에서도 병사들의 고통이 심하였다.
* 일본군의 남하
그해 일본군은 부산 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두 가지 원인이 있었는데, 하나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명나라 특공대가 한양에 침투하여 식량창고를 불태운 바람에 일본군이 식량 위기에 빠진 사실이다.
또 하나는, 심유경이 위협하기를 장차 명나라가 40만 병력을 동원해 일본군을 무찌르겠다고 했다. 만일 그 말이 현실이 된다면 일본군에게는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등 일본군 수뇌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이를 눈치챈 심유경이 고니시 및 가토와 3자 회담을 열고, 그해(1593년) 4월부터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휴전에 들어가기로 했다. 《실록》, 선조 26년 4월에 관련 기사가 보인다.
* 평화의 네 가지 조건 – 명나라 군대
1. 일본군은 조선 왕자(임해군, 순화군)와 수행원을 되돌려준다.
2. 일본군은 부산까지 후퇴한다.
3. 명군은 개성까지 후퇴한다.
4. 명나라는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한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이 일본에 정식으로 사신을 보낸 적은 없었다. 송응창(宋應昌)이 심유경과 공모해, 부하 사용재(謝用𨫃)와 서일관(徐一寬)을 황제가 보낸 칙사로 위장했다. 이런 식으로 일본과 명나라는 평화협상을 시작하였는데, 정작 전쟁 당사국인 조선은 협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선조 이하 조선의 모든 대신은 일본과 섣부른 강화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명나라 장수들은 일본과 협상을 서둘렀다. 이여송이 표면상으로는 조선이 원하면 일본군을 몽땅 토벌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실제로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막았다. 中野等, 《文禄・慶長の役研究の学説史的検討》 (PDF), 日韓文化交流基金、吉川弘文館, 2010年, 114쪽.
1593년 4월 18일, 명나라와 사전합의가 있었으므로 일본군은 조용히 한양을 빠져나갔다. 조선은 이여송에게 부탁해 철수하는 일본군을 격멸하라고 탄원했다. 그러나 이여송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旧参謀本部, 《日本の戦史 朝鮮の役》, 徳間書店、1995年, 217쪽.
퇴각할 때 일본군은 심유경과 명나라의 사신 및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대동하였다. 두 왕자는 가토의 호위를 받으며 남하하였는데, 그에 감사하는 취지의 서한까지 바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 서한은 현재 기슈(紀州)의 도쿠가와 가문에 남아있다.
순조롭게 부산까지 내려온 일본군은 4월에 이미 방어선을 구축했다. 서생포(현 울산광역시 서생면)에서 웅천(현 경남 진해)까지 성을 쌓은 것이다. 침략전쟁을 일으킨 지 일 년 만에 일본군은 완전히 수세로 돌아선 것이다.
이후 명나라 군대와 일본은 강화(講和) 조건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Elisonas, Jurgis (1991). "Chapter 6: The inseparable trinity: Japan's relations with China and Korea". In Hall, John Whitney (ed.).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Vol. 4.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235–300.
* 히데요시의 종전 조건
그해 5월 1일에 히데요시는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와 시마즈 타다토키(島津忠辰) 등을 견책하였다. 침략전쟁의 성과가 부진하였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벌하겠노라 별렀으나, 이제 명나라와 강화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어 전략상 차질이 드러났다. 히데요시로서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中野等, <唐入り(文禄の役)における加藤清正の動向>, (《九州文化史研究所紀要》, 56号, 2013年; 山田貴司 編著, 《シリーズ・織豊大名の研究 第二巻 加藤清正》, 戒光祥出版, 2014年.
그보다 며칠 뒤인 1593년 5월 8일에 고니시를 비롯해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三成)와 마스다 나가모리 (増田長盛) 및 오타니 요시츠네 (大谷吉継) 등이 명나라 사신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그들은 7일이 지난 5월 15일에 나고야에 도착했다.
히데요시는 그곳에서 명나라 사신과 만나, 다음의 7가지 조건을 강화조약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 히데요시의 평화 조건
1. 명나라 황녀를 천황의 왕비로 보낸다.
2. (일본의) 조공무역을 부활시킨다.
3. 일본과 명나라, 두 나라의 대신이 (평화의) 맹세를 교환한다.
4. 조선 팔도 중 남쪽의 4도를 일본에 할양하고, 다른 4도와 한양을 조선에 반환한다.
5. 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을 일본에 인질로 보낸다.
6. 포로로 잡힌 조선 왕자 2명(임화군 및 순화군)은 심유경을 통해 조선에 반환한다.
7. 조선의 대신들은 앞으로 일본을 배신하지 않기로 맹세한다.
명나라를 대표해 일본에 온 심유경은 이 모든 조건에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일본말을 전혀 모르는 사용재와 서일관 등에게 둘러대기를, 히데요시는 명나라에 복종할 뜻을 가졌으며, 곧 조공을 보내고자 한다고 했다. 아울러,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곧 군대를 철수할 것이라고 했다.
회견장에 동석했던 고니시는 히데요시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이미 동의를 표했으니, 명나라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확약을 얻으면 모든 일은 종결된다고 했다.
이상에서 보았듯, 심유경과 고니시는 진실을 은폐한 채 명나라와 일본이 사실상 ‘합의’에 도달한 것으로 꾸몄다. 그해 6월 28일에 히데요시는 고니시의 가신을 사신으로 임명해 베이징에 파견하기로 했다. 그리고 7월 중순이 되자 명나라 사신이 일본은 떠나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때 조선의 두 왕자를 풀어주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해 7월, 명나라 황제는 일본이 조공을 바친다는 다짐을 들었으므로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하라고 명했다. 이여송은 4만 병력을 거느린 채 귀국했고, 유정(劉綎)과 유격(游擊) 오유충(吳惟忠)만 7,600명을 데리고 조선에 남아 몇몇 요새를 지키게 되었다.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조선에 주둔하는 병력을 더욱더 감축하자고 주장해, 유정의 군대만 조선에 남겨두게 되었다.
하지만 강화가 추진되고 있을 때도 일본군은 말썽을 일으켰다. 그들은 대규모 병력으로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1593년 6월 하순 일본군은 9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제2차 진주성전투) 이 전투에서 의병장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및 충청병사 황진 등이 전사하였다. 하지만 일본군도 피해가 컸으므로, 감히 전라도로 진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 덕분에 전라도가 온전히 보전되었는데, 참으로 다행이었다. 전라도는 조선 제일의 곡창이요, 인구도 많아 일본군을 응징하는 반격의 기지였다. 이순신이 친지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若無湖南 是無國家)”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실제로 전쟁 중에 조정은 전라도 농민에게 가혹할 정도로 많은 부담을 떠안겼고, 이 일은 두고두고 큰 문제로 남았다. 17세기에 정승 김육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전라도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 지역에서 반드시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후유증이 심각하였다.
* 선조의 반대
1593년 9월 조선 국왕 선조는 명나라와 일본의 협상에 반대하는 뜻을 명나라에 밝혔다. 선조는 나라를 부흥시켜 준 점에 관해 명나라 조정에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일본군과 명나라의 강화 회담에서 조선이 완전히 배제된 점을 은근히 비판하였다.
이후 명나라는 계요총독(薊遼總督) 고양겸(顧養謙)에게 조선에 관한 사무를 일임하였다. 그때는 부산 일대에 주둔하던 일본군도 이미 대부분 귀국한 상태였다. 잘해야 2만 명쯤의 일본군이 부산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는 일본 측을 신뢰하지 않았다.
“일본의 정서는 교활하고 교활하다.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만력제는 이렇게 판단하였다. 어쨌든 전쟁은 소강상태였고,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1594년 10월 일본은 의화사(議和使)로 고니시의 가신 고니시 조안(小西如安)을 명나라에 보냈다. 그는 부산을 거쳐 베이징으로 갔다.
조안은 히데요시의 공식 서한을 휴대하였다. 그런데 송응창은 히데요시가 ‘항복’ 의사를 명백하게 쓴 문서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고니시는 송응창의 요구에 따라 <관백이 항복하는 표문>을 조작해 조안에게 건네주었다. 조안은 1594년 12월에 베이징에 도착해 가짜 항복 문서를 바쳤다.
* 병부상서 석성의 요구 사항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이 조안과 협상에 나섰다. 그때 석성은 조안에게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1. 일본 왕은 봉작을 받은 다음에 조선과 대마도에서 신속히 철수한다.
2. 일본 측에 책봉은 허락하나 조공은 용인하지 않는다.
3. 조선과 화해한 다음, 일본은 다시는 침략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조안은 이상의 조건에 즉각 동의하였다. 그즈음에 명나라 황제와 대신들은 조안이 가져온 가짜 항복 선언문을 읽고 크게 기뻐했다. 황제는 바로 히데요시를 “일본 왕”에 책봉하고, 일본의 대신들에게도 높은 벼슬을 내려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조안은 일본 대신의 명단을 제공하였다.
1595년 1월이 되자 명나라 조정은 다시 심유경을 일본에 보내 히데요시를 정식으로 일본 국왕에 책봉하려 했다. 히데요시에게 순화왕(順化王)이란 칭호를 주고 황금으로 만든 도장까지 하사하기로 했다. 그처럼 막중한 과제를 안고 심유경은 일본 사신과 함께 길을 떠났다. 심유경이 가져온 명나라 황제의 칙령은 현재 오사카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의 서한이 히데요시의 손에 들어간 것은 예정보다 반년도 더 지나서였다. 심유경은 문제의 책봉 교서를 전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침내 책봉의 교서를 읽은 히데요시는 분노를 터뜨렸다.
* 히데요시의 분노
“내가 일본을 다스리는데, 왕이 되고자 하면 스스로 왕이 될 것이다. 어찌 명나라의 책봉이 필요하겠느냐! 명나라가 도대체 무엇이냐?”
히데요시는 보란 듯이 명나라 황제의 칙령을 파기하고, 명나라 사신을 본국으로 추방하였다. 1596년 9월의 일이었다. 마침내 히데요시는 자신의 요구가 하나도 관철되지 않은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고, 치를 떨고 이를 갈았다. 그 후에도 심유경은 만력제가 히데요시의 본심을 끝내 알지 못하게 거짓말을 계속했으나 끝까지 진실을 숨길 수 없었다.
* 심유경의 처형
조선왕 선조는 일본이 다시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명나라 조정에 알렸다. 그리고 명나라 내부에서도 심유경이 그동안 가짜 문서를 통해 조정을 속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만력제는 심유경 등이 자신을 농락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형개(邢玠)에게 명령하여 병부상서 석성을 하옥하고 곧 심문하라고 명령했다. 또, 조선에 주둔하는 명군에게 명령하여 심유경을 체포해 즉시 처형하라고 명했다.
명나라와 일본이 협상을 시작한 뒤, 조선에는 평화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거짓 평화의 싹이 움트던 3년 동안 조선에 남은 일본군은 남해안의 몇몇 요새만 장악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밖에 지역은 조선이 모두 회복하여 큰 전투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던가. Turnbull, Stephen (2002), Samurai Invasion: Japan's Korean War 1592–98, Cassell &Co, p. 75.
그러나 1596년 9월 명나라와 일본의 협상이 완전히 결렬되자 전쟁의 암운이 다시 짙어졌다. 히데요시는 온 힘을 다해 조선을 침략할 준비를 서둘렀다. 이른바 정유재란이 목전에 이른 것이다. 평화🤔
- 백승종 교수 (전 서강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