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헬무트 슈미트와 헨리 키신저: 백승종 교수 독일의 전 연방총리 헬무트 슈미트와 미국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20세기 현대사의 격동기를

ree610 2026. 7. 10. 11:36

[역사 산책] 헬무트 슈미트와 헨리 키신저: 백승종 교수

독일의 전 연방총리 헬무트 슈미트와 미국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20세기 현대사의 격동기를 정면으로 관통했던 두 거물의 만남은 단순한 동맹국 정치가의 관계를 넘어, 60년 가까이 이어진 깊은 개인적 우정과 학문적 동반자 관계였다. 슈미트가 남긴 회고를 통해 우리는 서구 정치가들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깊은 인간적 인연을 맺었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냉혹한 국제정치의 본질은 무엇인지 목격하게 된다. 나아가 이들의 대화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외교와 정치를 돌아보게 만드는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이 글의 바탕이 된 대담은 2010년경 독일 공영방송 채널에서 촬영된 인터뷰다.

하버드에서 맺은 60년의 인연,
시대를 움직인 정치가들의 깊은 교유 :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50년대 후반 하버드 대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30대의 젊은 정치가였던 슈미트는 하버드에서 서툰 미국식 발음으로 강의하던 독일계 유대인 주니어 교수 헨리 키신저를 만났다. 슈미트는 키신저가 저술한 핵전략과 외교 정책에 관한 책을 읽고 깊은 학문적 자극을 받았으며, 이때 시작된 교류는 두 사람이 각각 자국의 국방부 장관, 국무장관, 그리고 연방총리라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수십 년간 이어졌다.

이들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긴박한 순간에도 자신이 집필한 논문이나 에세이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비평을 아끼지 않았다. 서구의 거물급 정치가들이 보여준 이러한 깊은 인연과 학문적 신뢰는 단순한 관료적 외교를 넘어, 위기 상황에서 국가 간 갈등을 조율하는 가장 강력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다.

“친구는 없다, 오직 국익뿐”...
미국의 철저한 자국 중심주의 :

하지만 슈미트는 오랜 친구를 향한 따뜻한 찬사 속에서도 냉혹한 국제 정치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시선을 잃지 않았다. 그는 키신저의 외교 철학을 “미국은 친구가 없다, 오직 이익만 있을 뿐이다”라는 비스마르크풍의 격언으로 요약한다. 키신저가 1970년대 감행했던 전격적인 베이징 비밀 방문과 미·중 수교의 발판 마련은 역사적 성과였지만, 슈미트는 이 역시 미국의 철저한 국익 계산 아래 움직인 결과라고 평가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본래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나라다. 동맹이라는 아름다운 수사 뒤에는 언제나 냉정한 자국 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슈미트는 오랜 친구인 키신저가 미국 국무장관으로서 국익에 충실했던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국익 중심의 좁은 시야가 오늘날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처럼 군림하며 국제사회의 갈등을 낳는 뿌리가 되었음을 날카롭게 경고했다.

신뢰의 외교를 지켜낸 인간적 유대,
그리고 한국 정치의 빈곤한 자화상 :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구권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동방정책’을 추진했을 때, 워싱턴 정가는 독일이 서방 동맹을 배신할지 모른다는 깊은 의구심과 불신에 휩싸였다. 이때 갈등의 실타래를 푼 것은 다름 아닌 슈미트와 키신저의 개인적 신뢰였다. 슈미트는 키신저에게 “브란트는 신뢰할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설득했고, 키신저는 “당신의 말이라면 믿겠다”며 화답했다. 또한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전 세계가 경제 대공황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핵전략에는 밝았으나 경제학에는 어두웠던 키신저를 끈질기게 설득해 오늘날 G7(세계경제공동체)의 모태를 공동으로 창설한 것 역시 슈미트와 유럽 정상들이 쌓아 올린 인간적 유대의 힘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두려움 속에서 대한민국의 정치를 돌아보게 된다. 과연 대한민국의 정치가 중에는 서구의 거물급 인사들과 이토록 깊은 개인적 인연을 맺고,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대등하게 전화 한 통으로 오해를 풀거나 새로운 국제 질서를 함께 설계할 수 있는 인물이 얼마나 되는가? 임기응변식의 의례적인 외교 방문이나 관료들이 써준 성명서를 읽는 수준을 넘어, 세계적 석학 및 정치가들과 학문적·사상적 궤적을 공유하며 깊은 인간적 신뢰를 구축한 정치가를 우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국제정치는 겉으로는 화려한 동맹의 외교적 수사로 포장되지만, 그 내면은 철저한 국익의 전쟁터다. 그리고 그 냉혹한 전쟁터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켜내고 파국을 막는 최후의 보루는 결국 정치가들이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인간적 신뢰와 인연'이다. 미국이라는 국익 중심의 거대한 괴물을 상대하며 자국의 운명을 지켜냈던 헬무트 슈미트의 고백은, 오늘날 글로벌 리더십과 깊은 외교적 자산의 빈곤에 시달리는 한국 정치권이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뼈아프게 가리키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한국의 젊은 엘리트들은 주요 국가의 젊은 인재들과 교분을 쌓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도,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는 필수적이다. 평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