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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하지 마라 - 박노해 엄니 배고프다아 신발도 떨어지고 공책도 떨어지고 외갓집에 가서 쌀 좀 가져오자아 뙤약볕 아래 남의 밭 매는 엄니

ree610 2026. 7. 2. 07:50

의지하지 마라

- 박노해

엄니 배고프다아
신발도 떨어지고 공책도 떨어지고
외갓집에 가서 쌀 좀 가져오자아

뙤약볕 아래 남의 밭 매는 엄니 곁에서
어린 나는 속도 없이 배고파 징징거렸다
훅훅 찌는 밭고랑은 매어도 매어도 끝이 없고
흰 수건 쓰고 뚝뚝 땀방울 떨구는 엄니는
빠르게 호미손만 놀릴 뿐 말이 없었다

긴 여름 해가 갯벌 바다를 붉게 물들일 때쯤
엄니는 뽕나무 아래 잠든 나를 업고 샘터로 가 씻기고
날랜 손으로 밀린 집안일을 단손하고 저녁상을 차렸다
정신없이 밥을 먹는 나에게 엄니는 당신 밥을 덜어주며
조용조용 그러나 단단하게 말씀하셨다

평아, 다시는 남의 쌀 가져오잔 말 꺼내지 말거라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의지하면 원망이 생기도 속이 물렁해져 사람 베리는
법이다
사지 육신 성하고 앞날이 창창한 사내가 자기 할 일을
버려두고
의지할 곳부터 찾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너 자신에게만 의지해라

많은 것을 겪고 많은 강을 건너고
아픈 시간들 속에서 때론 섭하고 때론 노하고
나도 모르게 탓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마다
그날 불볕 아내 남의 밭 매던 엄니의 묵묵한 호미손과
가난한 저녁 밥상의 엄정한 말소리가 울려오곤 한다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에 의지하지 마라
오직 진리의 힘에만 의지하고(法燈明)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라(自燈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