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항쟁의 구경꾼 – 빼앗길 수 없는 영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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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80년대를가로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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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0일의 아침은 뒤숭숭했다. 제목만 훑어본 조간신문만으로 분위기는 충분히 무거웠다. 이번엔 또 연세대학생이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의식이 없다니 오늘 시위는 정말 크겠구나. 하지만 항상 그래 왔듯 경찰의 '원천봉쇄'가 성공하고 자습 끝날 때쯤 되면 매운 냄새 나긴 해도 평온한 거리로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하루는 우리 역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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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6월항쟁의 개괄과 전개 과정을 설명하는 어리석음은 피하는 게 좋겠다. 그 이후 몇 주간 나는 본의 아닌 구경꾼 모드로 전환했다. 심정적으로는 시위대에 동의했을지 몰라도 나는 대한민국 공인 특수신분 고3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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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습이 좀 빨리 끝났다. 자습이 끝나고 버스를 타러 달려왔는데 버스가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전철을 타려고 해도 서면까지는 가야 했는데 서면까지 가는 길이 시위대로 막혀 버렸다는 것이다. 무려 밤 10시에! 빨리 걸어도 1시간 가까이 걸어가야 한다는 암담한 소식이었다.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꼬불꼬불 언덕길을 내려 서면 가는 대로에 접어들기가 무섭게 함성이 들려왔다.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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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고3은 시위대와 경찰 대열을 모두 통과해서 서면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는 버스가 안 다니려나 했지만 또 시위대를 만났고 다시 경찰 대열과 조우했다. 그런 식으로 서너 번의 시위대+경찰 터널을 넘어서야 서면까지 올 수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당시 부전동에 있던 어머니 가게 (부전동에서 약국을 하셨다.)에 이르렀을 때 부모님이 걱정 그득한 얼굴로 맞아 주셨다. "무슨 일 없었나?" "구경 잘하면서 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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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을 한바탕 치른 뒤 대치만 하는 상태였기에 위험한 풍경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배를 쥐고 웃을 일이 몇 번 있었다. 당시 시위대 대열을 몇 번 통과했지만 '운동권 노래'를 들은 적은 없다. "우리의 소원은 자유"를 부르고 애국가를 부르다가 구호 외치고 전두환 물러가라 와아아 박수치다가 지루해지면 유행가를 부르기도 했다. 전경 앞에서 "꽃 피는 동백섬에"를 불러대는데 그저 깔깔대고 웃고 말았다. 나 원 롯데 자이언츠 응원왔나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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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인상 깊었던 노래는 "새 나라의 어린이"를 노가바한 노래, "새 나라의 대통령"이었다. "새나라의 대통령은 대머리가 아닙니다 대머리가 없는 나라 우리 나라 좋은 나라." 이 노래를 부르면서 구경꾼이고 시위대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더 뒤집어지는 순간이 왔다, 웬 넥타이 맨 대머리 아저씨가 앞으로 튀어나와 율동(?)을 하며 노래를 부른 것이다. '새나라의 대통령은 대머리가 아닙니다'에서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도리도리 그 '빛나리'를 구경시킬 때 모두가 허리를 꺾고 웃었다. "나도 대머리가 싫어요." 아저씨가 부르짖을 때는 아마 멀리서 보던 전경들도 웃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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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재미있었지만 돌아보건대 그 상황은 경찰의 '원천봉쇄'가 실패의 결과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들어 떠들고 노래하고 구호 외치고 연설 듣고 할 수 있는 공간이 도처에 마련된 것은 경찰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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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며칠간도 시위가 이어졌고 버스는 툭하면 끊겼다. 부산은 서면에서 남포동에 이르는 메인 스트리트가 막히면 모든 교통이 마비된다. 부산의 도로망은 주요 간선도로에서 실핏줄처럼 뻗어나가는 형태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온전하게 노선을 다닐 수 있는 버스가 없었다. 거기에 부산 사람들은 뭘 먹어서 그리 힘이 좋은지 몰라도 시위를 밤새 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아침 등굣길이 시위대에 막힌 적도 있었다. 날이 갈수록 시위는 격화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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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학교에서 부전동까지 걸어 오던 날 밤의 일이었다. 격전이 벌어진 듯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최루탄 가루를 뚫고 걸었다. 전경들은 사방에 있었고, 잡힌 학생들이 버스 안에서 쥐어박히는 것도 보았다. 으스스한 느낌으로 부전동 근처에 왔는데 어두컴컴한 시장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 악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이름도 유명한 '백골단'이 붙잡힌 대학생을 인정사정없이 짓밟고 있었다.
당시 '백골단'의 정체는 실로 미스터리였다. 후일 사복 전경을 백골단이라 일컫지만 당시 부산 거리에서 종종 봤던 백골단은 절대로 젊은 전경이나 의경이 아니었다. 나이는 서른 이상, 마흔줄 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깡패들이다 아니다 무술 경관이다 설왕설래도 많았다. 그들의 폭력성은 정복 전경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 눈 앞의 백골단도 학생을 그냥 구타하는 게 아니다. 점프를 하면서 바짝 엎드린 학생의 등에 발꿈치를 내리꽂았고 제대로 된 돌려차기로 학생의 몸뚱이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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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놈은 그 험악한 발길질마다 고함을 질렀다. 막연한 욕설이 아니었다. “놔 이 개새끼야." 퍼억~~ "그거 놔, 임마.” 콰악, "어디 한 번 죽어 봐라. 그거 내놔. 임마" 퍼억. 정복 전경들이 그러고 있으면 몰려와서 말려 줬을 주변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얼씬을 못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릴 때에도 살기가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까지 때리나 싶었을 때 학생이 뭔가 감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감쌌다기보다는 움켜쥐고 있었다. 그 내용물이 뭔가를 자세히 봤더니 무슨 액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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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 몰라도 그게 중요한 것 같으면 이미 기진맥진한 학생 품에서 빼앗으면 될 텐데 백골단은 “그거 내놔.”만 외쳤다. 즉 그는 항복을 바라고 있었다. 고통을 못이긴 사람이 울며불며 내미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학생은 액자를 가슴에 그러안은 채 실신해 버린 듯 반응이 없었다. 그제야 백골단은 학생을 거칠게 헤집어 액자를 빼앗았다. 그건 다름아닌 박종철 학생의 초상화였다.
액자는 산산조각이 났다. 박종철의 얼굴도 갈기갈기 찢겼다. 그걸 찢으면서 백골단은 욕설을 퍼붓고 학생을 밟아댔다. 마지막 자비인지 아니면 기절한 학생 들고 가기가 귀찮아선지 그는 학생을 그냥 두고 번잡한 쪽으로 총총 걸어가 버렸다 그제야 사람들이 엎드려 있던 학생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한 아주머니가 애타게 학생! 을 부르짖고 학생이 꿈틀하며 피 머금은 얼굴을 움직였을 때 나도 눈물이 나는 줄 알았다. “살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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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귀가해서 이 이야기를 하니 아버지도 당신의 목격담을 들려 주었다. 어느 젊은 기독교 목사, 전도사들의 시위였다. "목사 전도사들인데, 가운 입고 띠 두르고 길거리에 주저앉은 거야. 앉아서 노래만 계속 불렀어. 무슨 녹음 테이프처럼.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 예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우리 앞에 누가 서리요. 예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승리를 얻겠네.' 그래도 목사들이라 그런지 전경들이 두들겨 패지는 않더라고. 대신 머리 위에서 최루탄을 빵빵 터뜨렸지. 머리가 새하얗게 되도록 최루 가루 뒤집어쓰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도 찬송가는 계속 부르고 도망가지도 않아. 목사는 목사더라고."
당시 한국인들에게 예수는 박종철일 수도 있었다. 신성모독을 범하자는 게 아니다. 박종철은 무심히 일상을 살며 독재에 순응하던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 죄를 짊어지고 대신 목숨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김수환 추기경이 박종철 추모 강론에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을 때 가슴을 쳤던 모든 이들에게, 박종철이 거친 숨 토하며 죽어간 욕조와 예수의 십자가는 무엇이 달랐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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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신할 지경까지 두들겨 맞아도 박종철의 초상을 지키려 한 대학생에게도, 최루 가루 범벅이 돼서도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 통곡하며 노래한 목사들에게도, 새 나라의 대통령은 대머리가 아니라며 자신의 대머리를 가리키며 사람들을 웃겼던 아저씨에게도, 박종철의 이름은, 그리고 서울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이한열의 얼굴은 그저 범상한 이름 석 자와 형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종철이를, 한열이를, 그 젊은 영혼들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덤비고 있었다. 6월 19일 귀가하던 나는 소름이 쫙 끼치는 외침을 듣는다. "서면에서 남포동까지 다 데모대라요!"
6월항쟁 39주년 기념 리바이벌. 김형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