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피성: 거룩한 브레이크
* 말씀: 민수기 35장 11-12절
인간의 분노는 빠르다. 상처를 받으면 마음은 곧장 판결을 내리고, 억울함은 쉽게 복수의 상상력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복수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 다만 상처의 자리를 옮겨 놓을 뿐이다.
민수기 35장의 도피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브레이크다. 하나님은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가 곧장 ‘피의 보복자’의 손에 넘겨지지 않도록 도피성을 마련하셨다. 이것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우발과 악의, 실수와 고의를 구별하여 사법의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다.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한 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민 35:11-12)
1. 분노가 재판관이 되지 않게 하라
도피성은 먼저 분노의 속도를 늦춘다. 분노는 빠르고, 정의는 느리다. 분노는 감정으로 판단하지만, 정의는 사실을 살핀다. 그래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통해 "멈추라"고 말씀하신다. 복수의 손이 먼저 움직이기 전에, 공동체가 듣고 판단하고 분별하도록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사적 보복이 멈추는 자리에서 사법적 정의가 시작된다.
오늘 우리 사회도 빠른 분노에 익숙하다. 말 한마디, 실수 하나, 과거의 한 장면으로 사람 전체를 단정한다. 상처 입은 마음이 곧장 재판관이 되면, 관계는 회복되지 못하고 처벌만 남는다. 도피성은 우리에게 말한다. "분노가 정의의 옷을 입지 못하게 하라."
2. 은혜는 책임을 덮지 않고, 파멸을 막는다
도피성으로 피한 사람은 자유롭게 모든 것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 안에 머물러야 했다(25절). 도피성은 안전했지만, 동시에 일상으로부터 격리된 공간이었다. 이것은 책임 없는 은혜가 아니다. 도피성은 값싼 면죄부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면서도 책임을 감당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은혜는 책임을 회피하게 하지 않고, 책임을 감당할 시간과 자리를 준다. 은혜는 죄를 덮어 숨기는 어둠이 아니라,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빛이다.
3.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은 생명을 지키는 땅이다
민수기 35장의 끝은 단호하다.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34절)고 말씀한다. 피 흘림은 단순히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땅을 더럽히고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왜냐하면 그 땅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공동체는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고의적 폭력은 엄중히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복수의 폭주도 거룩한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아야 한다. 정의 없는 자비는 무책임해지고, 자비 없는 정의는 잔인해진다. 도피성은 그 둘 사이에 세워진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다.
예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죄인을 끝장내지도 않으셨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복수의 악순환을 끊으셨다. 사람들은 그를 못 박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다. 십자가는 인류의 폭력이 하나님의 용서 앞에서 멈춘 자리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민수기 35장의 도피성은 오늘 가자지구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복수의 이름으로 생명을 짓밟고 있지는 않은가?" 하마스의 폭력과 인질 납치는 악하다. 그러나 그 악이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보복의 정당한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피는 피로 씻기지 않는다. 피는 땅을 더럽힌다. 도피성의 하나님은 복수의 질주에 브레이크를 거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모든 테러를 거부하면서도, 어떤 이름으로든 행해지는 과도한 보복과 집단적 폭력 역시 거부해야 한다.
이제 우리 마음에도 이 거룩한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전속력으로 내딛는 분노를 멈추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가 되라고 오늘 말씀이 우리를 초대한다.
**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우리 안의 빠른 분노를 멈추게 하소서.
상처를 복수로 갚지 않게 하소서.
죄는 분별하되 사람을 끝장내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정과 교회가 도피성 같은 공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복수의 마음이 녹게 하소서.
정의와 인자가 함께 흐르는 공동체를 세우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