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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새겨진 감옥, 고문 후유증의 전수 조사를 위하여 - 백승종 (역사가) 역사는 기록된 문장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다. 때로 역사는 살아

ree610 2026. 1. 26. 23:15

몸에 새겨진 감옥, 고문 후유증의 전수 조사를 위하여 - 백승종 (역사가)

역사는 기록된 문장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다. 때로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비틀린 뼈마디에,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충혈된 눈등에, 그리고 결코 아물지 않는 영혼의 흉터 속에 고스란히 저장된다.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화려한 꽃을 피웠다고 자부하는 오늘날에도, 그 뿌리 밑바닥에는 독재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문’이라는 이름의 독소가 여전히 흐르고 있다.

1. 눕지 못한 육체, 의자라는 이름의 공포

고(故) 김근태 장관의 삶은 한국 현대사가 짊어진 고통의 집약체였다. 그는 민주화의 상징이었으나, 동시에 평생을 고문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했던 망명객이기도 했다. 그가 치아가 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 치과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비극적인 은유다.

치과 진료를 위해 젖혀지는 의자는 그에게 진료대가 아니라, 과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신을 옥죄던 고문틀로 다가왔다. 육체는 감옥을 나왔으나, 그의 무의식은 여전히 그 차가운 금속 기구 위에 묶여 있었던 셈이다. 고문은 이처럼 인간의 가장 일상적인 평화를 파괴하며, 죽는 순간까지 지속되는 형벌로 기능한다.

최근 작고한 이해찬 전 총리의 죽음 또한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세간에서는 그가 평생 짊어지고 온 고문의 후유증이 그의 생을 앞당겼으리라 짐작한다. 한 개인의 강인한 의지로도 끝내 이겨낼 수 없었던 생물학적 파괴, 그것이 바로 독재가 남긴 잔인한 유산이다.

2. 파괴된 신뢰와 조작된 인간관계

고문의 진정한 무서움은 단순히 육체적 가해에 머물지 않는다. 고문 기술자들은 육체를 도구 삼아 인간의 영혼을 사냥했다. 거짓 자백을 강요하여 사건을 조작하고, 가장 믿었던 동료들을 이간질해 본인을 배신자로 낙인찍게 만드는 행위는 인격의 총체적 말살이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동료에게 배신당했다는 피해의식과, 자신이 동료를 팔아넘겼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국가 권력이 한 개인의 내면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붕괴는 사회생활의 단절로 이어지며, 피해자를 영원한 고립 속에 가둔다.

결국 고문은 한 사람의 인생을 넘어 그 가족의 삶까지 통째로 붕괴시킨다. 가장의 비명은 벽을 타고 흘러나와 가족의 일상을 공포로 물들이고, 경제적 무능력과 심리적 불안은 대를 이어 대물림된다. 우리 사회는 그들의 무너진 삶을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하며 방치해 왔다.

3. 대물림되는 통증, 잊힌 역사의 증언

필자의 선친 역시 그 어두운 역사의 한복판을 지나온 분이었다. 1945년부터 1948년 사이, 해방 정국의 혼란 속에서 받으셨던 지독한 고문은 평생토록 아버지를 괴롭혔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습관성 탈장으로 고생하셨으나, 그것이 국가 폭력의 결과임을 증명할 길은 막막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겪었을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이제 개인의 서사를 넘어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고문의 후유증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증발하는 안개가 아니며,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피해자의 생존을 갉아먹는 암세포가 된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국가 차원에서 고문 후유증에 대한 총체적인 실태 조사를 시행한 적이 없다. 민주화 운동 보상심의위원회를 통해 일부 보상이 이루어졌으나, 그것은 파괴된 삶을 복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행정적 절차에 불과했다. 피해자들이 어떤 병을 앓고 있으며, 그들의 정신적 내상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이 절실하다.

4. 국가의 의무와 고문의 영구적 퇴출

이제 국가가 나서야 할 때다. 이해찬 전 총리의 죽음을 단순히 한 정치인의 퇴장이 아닌, 고문 피해 세대의 마지막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문의 후유증을 총체적으로 조사하고, 생존해 있는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의료 지원과 심리 치유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최소한의 도리다.

조사는 단순히 피해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고문이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고 사회적 관계를 해체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밝혀내야 한다. 이러한 기록은 미래 세대에게 국가 권력이 선을 넘었을 때 벌어지는 참혹한 대가를 가르치는 가장 강력한 역사 교과서가 될 것이다.

고문을 영원히 이 땅에서 추방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또한 마련해야 한다. 고문은 인류 문명에 대한 범죄이며, 이에 대한 공소시효는 존재할 수 없다. 고문 기술자와 배후 세력에 대한 엄중한 추적과 함께, 다시는 국가가 시민의 육체를 볼모로 삼지 못하도록 감시 체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

5. 상처 위에 세우는 진정한 민주주의

고문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고통이다. 피해자들의 비명은 수십 년 전의 고문실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그들의 일그러진 육신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그들이 겪는 통증을 외면하는 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반쪽짜리 체제일 뿐이다.

국가는 이제라도 침묵을 깨고 그들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전수조사를 통해 숨겨진 눈물을 닦아주고, 고문이라는 야만의 역사를 종결짓는 것만이 역사의 이름으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그것이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예우이자, 살아남은 이들의 남은 삶을 보듬는 국가의 책무다. 평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