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 그분!
* 말씀: 요한일서 1장 1절
기독교 신앙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접촉의 신앙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신을 거대한 신학 체계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경험을 말한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복음은 이렇게 감각의 언어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멀리서 응시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분이다. 요한은 이 진리를 세 개의 동사로 압축해 낸다: 듣다, 보다, 만지다.
1. 들었다:
하나님이 먼저 말을 걸어오신 사건
신앙은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선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신 계시 사건이다. 우리의 ‘들음’은 하나님의 먼저 말씀하셨다는 증거다. 듣는 신앙은 '순종하는 귀'를 가진 신앙이다. 여기서 듣기는 지적 동의를 넘어 영혼의 개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영적 소환장이다.
오늘 우리는 소음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말은 넘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희미해진 시대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곧 세상 소음에 대한 영적 저항이다. 복음의 첫 문은 언제나 경청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2. 보았다:
눈이 열릴 때 시작되는 신앙
요한은 두 개의 '보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하나는 시각적 확인이고, 다른 하나는 깊은 관찰과 응시다. 보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 작용을 넘어 계시적인 현실을 인식하는 해석 행위이다.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4)라는 요한의 말은 예수님의 외모가 빛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 곧 사랑, 진리, 은혜가 드러났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외모를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그분의 키, 얼굴형, 피부색, 머리색 등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침묵이다. 예수님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면, 그 얼굴은 어느 특정 문화와 인종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신약은 그 길을 거부한다. 보지 못함으로 진정으로 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예수님의 참된 얼굴은 종교적 초상이 아니라 갈보리의 사랑, 즉 자기 비움의 영광이다. 보는 신앙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읽어내는 신앙이다. 고난 속에서 열리는 인식, 눈물이 마른 자리에 드러나는 새로운 시각, 이 모든 것이 요한이 말하는 ‘보았다’의 세계다.
3. 만졌다:
촉각을 가능하게 한 성육신의 신비
‘만졌다’는 동사는 요한 신학의 정점이다. 당시 어떤 이들은 물질은 악하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가현설:Docetism). 요한은 이 한 문장으로 그것을 산산조각 냈다: "우리가 그분을 만졌다."
촉각은 실재의 가장 강한 증거다. 귀는 속고, 눈은 착시를 경험하지만,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몸을 만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물질 세계 속으로 들어 오셨다는 선언이다. 먹고 마시고 피곤해하며, 상처 입고 피 흘리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실제의 몸으로 오셨다는 증언이다.
신약은 예수님의 외모에는 침묵하지만, 몸의 실재에는 침묵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비현실적 영성’을 꿈꾸는 종교가 아니다. 몸으로 오시고, 몸으로 사랑하시고, 몸으로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예배하는 신앙이다. 무엇보다 성찬은 이 ‘만짐의 신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식이다.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 우리는 "그분의 몸을 만지는 신앙"을 체험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의 상처를 만지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 그 자체가 깊은 신앙 행위다. 사랑은 언제나 몸을 가지고 온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생명의 말씀은 개념이 아니라 인격이다.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만진 그분…" 그분이 바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는 정보의 종교가 아니라 관계의 종교, 데이터가 아니라 접촉의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이 아니라 몸으로, 눈물로, 사랑으로 다가오셨다. 그래서 요한은 선언한다.
“우리는 들었고, 우리는 보았고, 우리는 만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동사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오늘 우리 신앙을 다시 묻는 질문이다.
생명의 말씀은 오늘도 우리의 귀를 두드리고,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 삶으로 들어오신다. 그분은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만진 바로 그분이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이 오늘도 가슴 벅찬 이유이다.
** 기도문
들리고, 보이고, 만져지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
우리로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우리 눈을 밝히사 당신 몸의 흔적을 보게 하소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마음의 손으로 당신을 만지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 삶을 예수님의 생명으로 채워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