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는 하나님이 되시다” - 성육신: 스스로 금령을 깨뜨리신 사건 –
* 말씀: 요한복음 1장 14절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명령 가운데 하나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 20:4)는 금령(禁令)이다. 하늘 위나 땅 아래나 바다 속 어떤 것도 하나님을 형상화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한 금지 조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성과 초월성, 곧 '타자성'을 보호하는 울타리였다. 인간이 만든 형상은 결국 자기 욕망과 두려움을 투사한 작은 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더 이상 '형상화 금지의 하나님'으로 머물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사건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스스로 보이는 얼굴을 가지셨다. 왜일까?
1. 금령의 파기인가, 금령의 완성인가?
금령의 목적은 하나님이 보이는 형상으로 왜곡되는 것을 막는 데 있었다. 인간이 만든 형상은 언제나 하나님을 조작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력보다 더 거룩하시고, 더 신비로우시다. 그렇다면 이 금령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무엇인가?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성육신은 금령의 파기가 아니라, 오히려 유일한 합리적 해제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들 수 없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그(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골 1:15)
하나님을 형상화해선 안 되는 이유는 인간 때문이었고, 하나님이 형상을 입으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2. 왜 '보이는 하나님'이 되셨는가?
1) 사랑은 얼굴을 가진다
사랑은 추상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랑은 반드시 얼굴을 가진다. 인간이 가장 깊이 변하는 순간은 말의 설명이 아니라 얼굴의 대면을 통해서다. 모세는 "주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출 33장)라고 요청했지만 하나님의 등을 볼 뿐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고백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 (요 1:14).
모세가 보지 못했던 그 영광, 그 얼굴을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본다. 사람의 얼굴을 통해 '이것이 나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얼굴을 통해 사랑을 배우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말로만 사랑을 설명하지 않고, 직접 살(flesh)이 되어 찾아 오셨다.
2) 왜곡을 멈추기 위해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오해해 왔다. 광야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오늘 우리는 성공, 안전,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재구성한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건이다. "너희가 상상한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여주는 하나님을 보라.“
또한 구약의 형상 금지는 거룩한 거리두기였다. 그러나 인간의 상처는 거룩한 거리두기로는 치유되지 않는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그 육신은 고난받을 수 있는 몸이 되었다. 십자가는 성육신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다. 보이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은 곧 상처받을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뜻이다. 상처받고 신음하는 우리와 연대하시기 위해, 고난당하는 하나님이 되셨다.
3. 은혜와 진리의 얼굴
요한은 그분의 얼굴을 두 단어로 소개한다: 은혜와 진리. 진리는 우리의 상처와 죄를 직시하는 투명함이고, 은혜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품는 자비로우심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는 얼굴, 그것이 예수님의 얼굴이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형상보다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얼굴이다.
형상 금지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호하는 울타리였고, 성육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파격적 돌파였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최고의 자기 내어줌(kenosis)이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다. 오늘도 우리의 두려움, 실패, 상처 한가운데 서 계신 분은 우리가 상상해 만든 작은 신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우리 가운데 오신 임마누엘“이시다. 이 성육신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맞이하는 대림절이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 삶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내려가는 우리 믿음의 친구들이 되길 소망한다.
** 기도문
보이는 얼굴로 오신 예수님,
상처받을 수 있는 몸으로,
거절당할 수 있는 사랑으로,
십자가의 길까지 감당하신 주님,
우리의 두려움과 실패와 상처의 자리에도
이미 곁에 와 계신 임마누엘을 신뢰하게 하소서.
이제 주님과 함께 오늘을 담대히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