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나누고 싶은 이야기

이제 귀 기울이고 듣는 대통령의 시대로 -유정현 (목사, 치유상담학자) “It‘s the relationship that heals."

ree610 2025. 11. 2. 22:47

이제 귀 기울이고 듣는 대통령의 시대로
-유정현 (목사, 치유상담학자)

“It‘s the relationship that heals."
대통령과 시민의 ‘관계’가 바뀌어 가고 ‘치유와 회복의 관계’로 변해가고 있다.

1. 거리에서

1시간 국무회의에서 혼자 50여분을 떠들고 끝내던 자의 시대가 저물었다. 많은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에서 부르짖어도 결코 듣지 않던 자는 지금 조용한 곳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그도 한 기괴한 여자의 소리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즐기고 있을까?

그 자가 대통령 출마 후보자가 되었을 때 그리고 당선 되었을 때 가톨릭대 L박사와 나는 수차례 눈물과 분노를 섞어가며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분명 두렵건대 저자로 인해 세월호 아이들을 잃어버린 것처럼 가장 여리고 힘없는, 우리가 지키고 돌보아야할 이들이 상하는 사고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터인데...” 라고

3년 전 이태원 참사 소식에 나만이 아닌 수많은 시민들은 분노와 슬픔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와 우리가 이럴진대 유족들은 오죽하셨을까. 사후 처리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는 더욱 분노하였고 나 역시 더욱 악을 쓰며 시청 앞 거리에서 외쳐대었다.
    
이제 이잼의 시대가 열리고 이제 시민은 담아만 두었던 이야기를 말하고 대통령은 듣는 시대가 왔다. 이제 잼통이 그늘지고 소외되었던 곳에 발을 들이고 시민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리고 국무회의를 통해 혹은 실무자들과 회의를 통해 듣고 말해가면서 시민들에게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국정에 반영해 나가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보는 내내 그저 흐뭇하게 한다. 며칠 전 대구 엑스코 타운 홀에서 ‘대구의 마음을 듣다’라는 제목으로 대구시민들과 미팅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일련의 변화되는 현실로 인해 지난 시간 거리에서 질러대던 악다구니가 이제 아름다운 에코가 되어 돌아오고 있음을 느낀다.

2. 털어놓기와 들어주기

지난 토요일엔 시청 앞 시민광장에서 이태원 참사 3주기 시민 추모제가 있었다. 유족들과 수많은 시민들 그리고 김민석 총리를 비롯한 정부 관계자와 다수의 각 당 국회의원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3년 전 그 추운 날 이태원에서 가수 하림이 손이 곱아서 키보드 치느라 애를 먹던 그 때와는 확연히 달리, 날씨도 그리 사납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기획과 연출이 먼저 고인과 유족들을 위한 것이었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참석한 우리들도 행사에 집중하게 되며 높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잘 준비된 추모제라는 느낌이 저만큼 구석에 앉아 있던 나에게도 전해져서 나 역시 내 감정에 충실할 수 있었다.

해프닝 하나, 순서에 따라 오세훈이 등장하고 또 호명하여 인사할 땐 각본에 없는 야유와 욕설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물론 근 3년 태평로에서 배우고 잘 단련된 내 욕도 찰지게 섞여 있었다.  

암튼 추모제 순서 중 한 가지 감동을 더한 것이 있었으니 14개 외국 21명의 참사 희생자 가족 중에 서울에 와서 갑자기 병으로 힘드신 중에도 나오신 오스트리아에서 온 인홍이 부모님 등 13개국 46분의 유족들이 정부의 공식초청으로 참석하였고, 추모순서 중에 그 분들이 자국어로 준비한, 떠나간 이와 나누는 애통한 이야기를 한분한분 읽어나갔고 동시통역을 통해 우리는 함께 슬퍼할 수 있었다.

참 고마운 기획과 연출이었다.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일에 국가와 인종의 구분은 무의미했으며 그들은 털어놓고 우리는 들으며 슬픔과 애통함에 한가지로 공감하는, 상담계에서 말하는 그룹 다이내믹의 현장이 펼쳐졌었다.

그날 저녁 3년 전 최초의 신고전화가 접수되었던 6시 34분에 시작한 시민추모제에서 우리는 위로와 치유의 장에 잠겨들 수 있었다.        

3. 믿음은 들음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 줄 귀를 찾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들어야 할 때에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들어 줄 귀를 찾지 못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 곧 가까운 이웃들에게 경청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곧 하나님께도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다.” 한 때 우리가 윤석열에 빗대어 인용했던, 히틀러를 끌어내려야 할 미친 버스 운전수에 비유한 본회퍼 목사의 말이다. 물론 이 호소는 비단 교회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병들었던 구조 속에서 중병을 앓던 한국 사회가 큰 위기를 넘기고 있다.

조요토미 희대요시로 불리는 자와 쥐귀연 등 검찰로 인해 은근슬쩍 묻혀 있던 사법부의 패악한 무리들이 한삽한삽 파헤쳐지고 있다. 그들은 귀에 말뚝을 박아놓은 것들이다. 억울한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한 맺힌 이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닫고 있다. 정의와 평화를 구하는 외침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지금 나라 각처에서 지르는 돌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안 듣는다. 하늘을 거스르는 것들, 이미 죽은 것들이다.

4.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선악과 이야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익히 아는 내용이다. 이는 단순히 창세기 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 순간 내가 선 자리에서 나와 우리에게 물어오는 선택의 질문이다.

우리는 한 가족의 구성원이면서 한 나라의 국민이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정치 경제 교육제도 속에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정치가 부패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신뢰가 추락하고 지지 기반이 위태로워질 때, 권력자는 극단적인 방법을 구사하게 되는 바 저기 홀로 건빵과 라면 달라며 재판에도 나오지 않고 뻗쳐대는 얼치기가 계엄이라는 저지레를 했다. 우리는 이러한 불의의 권력질에 의한 충격과 공포로 인해, 비록 섬세하게 자각하진 못하더라도, 분명 불안 신경증세 그리고 정서적 정신적 기능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이 저하되는 현상을 크고 작게 겪었고 또 후유증을 앓고 있다.

광주의 유족들과 시민들은 어땠을까. 지금도 어떠할까. 사회 한편에서 이ㄴ 계엄선포에 의한 공포 피해보상 청구도 있다. 여튼 무소불위의 독재정치를 하는 패악한 정권이 국민들의 판단이나 비판 기능을 흐리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충격수단을 사용한 것인데, 그 자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저지른 뻘짓거리에 굴하지 않고 우리는 그 불안과 공포를 딛고 맞섰다 그리고 맞서고 있다. 건강한 시민 건강한 사회다.  

계엄 선포 이후 국회에서 계엄 해제가 결의되자 새벽에 또 선포하면 된다는 말을 한 者도 있었다. 만일 충격의 상태가 채 정리가 되기 전에 또 다른 충격이 연속적으로 가해졌다면, 우리 사회와 국민들은 결국 이성적 기능을 잃고 판단이나 비판 기능이 마비되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발생하는 파괴는 가히 상상하기가 무섭다.

한편 이러한 기능의 상실은 충격에 의해서도 나타나는 증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위험이나 위기상황을 싫어하여 현 상황에서 도피 혹은 회피하려는 사람의 심리에서도 연유한다. 모든 인간은 불안과 긴장에서 벗어나려는, 평온을 유지하려는 욕구가 있기 때문인데, 그저 타협하고 협력하여 좋게~좋게~ 하자는 무리들이 있다. 이들이 빠트리지 않는 말이 ‘국민을 위해서’이다. 사악하기 짝이 없는 기생충들이다.

이미 가해진 충격으로 인해 정신기능이 약화된 상태에서 평온을 유지하고 싶은 욕구가 작용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고난 상황을 자각하지 못할 뿐더러 다른 이들의 고통에도 무감각해져 무관심하게 된다. 이러한 증세는 고난의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스스로 이러한 자극에 반응하는 자신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소위 우리가 미덕으로 여기고 칭찬으로 삼는 ‘잘 참는’것 때문이다.

나는 나를 비롯한 이런 삶의 성향을 지닌 이들을 ‘착한 병 환자’라 자조 섞인 농담을 하곤 한다. 그러나 단순히 웃고 넘기기엔 의외로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드러나지 않는 증세 중 하나이다. 아무튼 이 증세를 안고 사는 이들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를 넘어서지 못하면 현 상황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또한 이제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기득권 카르텔, 그러면서 기왕에 구축해 놓은 그들만의 정당성과 합법성으로 무장하고 권력의 패악질을 여전히 구사하고 있는 무리들로 인해 멍들고 병드는 사람은 결국 다수의 시민들이다. 이들 중에는 극단적인 위기 사태와 극심한 고통이 눈앞에 닥쳐와도 당장 내 발 앞에 불똥이 떨어지지 않는 한 그저 수수방관하거나 나아가 오히려 불의의 권력을 옹호하는 것으로 내면의 피난처를 만든다.

심지어 눈앞의 상황을 저만치 건너편에 서서, 갖은 학문과 지식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행위로 자신을 옹호하거나 심지어 종교적 잣대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분명 지은 죄의 대가를 받고 있다는 식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평을 해대며, 눈앞의 불안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자신만을 지키면서 교묘히 피해가려고 한다.

이런 무리들이 판을 치며 닥쳐온 고난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이미 죽어가고 있다. 이 경우 진부한 낙관주의나 극단적인 비판이 난무하게 된다. 이는 분명 앞을 보지 못하는 어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진보팔이나 재난 비즈니스로 사람들 정신을  빼앗아대는 소위 '선수'들이 대표적인 잡것들이다.

5. 고난의 江에서

‘주님께서 여호수아를 시켜 백성에게 명령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지시한 일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기까지, 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강 가운데 서 있었다. 백성은 서둘러 강을 건넜다.
백성이 모두 건너기를 마치자, 주님의 궤와 그 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이 보는 앞에서 건넜다.
주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 가운데서 올라와서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마른 땅을 밟는 순간, 요단 강물이 다시 원래대로 흘러 전과 같이 강둑에 넘쳤더라.’
(새번역 여호수아 제4장 10,11.18절)

각 종교의 자칭 지도자라는 자들은 물론 특히 요즘 자주 쓰는 말로 임명직 그리고 선출직 공직자들은 이 모습을 닮기를 아니 흉내라도 내기를 권하고 요구한다.

강자가 독점하고 권력이 모두를 누리며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는 사회구조를 훼파하는 지름길은 제도 이전에 테레사 수녀가 말했던 ‘한 사람’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점의 원리가 출세라는 이름으로 득세를 하니 사회는 기득권의 발아래에서 젊은이들이 말하듯 노력을 해도 결코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접거나 저무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

말석의 나와 우리들 소위 좀 배운 자들은 경계하기를 미국식 예외주의 같은 우쭐함에 취해 문화적으로 순응하거나 정치적으로 한 치의 타협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특권이라는 달콤한 덫에 걸린 서구의 엘리트 의식에 적응되어, 진정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듣고 보지 않은 채 자신의 이러한 의식의 필터를 거친 지적인 글과 말로는 이 땅의 소외된 이들의 아파하는 목소리를 제대로 표현해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끊임없이 성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유들이 내는 말과 글은 성경에서 말하는 ‘허공을 치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C. G 융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영국 BBC를 통해 전 유럽을 대상으로 진행한 2시간여 인터뷰에서 ‘선생님은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치료(치유)할 수 있었습니까?’ 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한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만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대답하였다. 지금 한 사람, 여기 가까이의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종교 지도자여, 공직자들이여, 지식인, 정치인들이여,

누구보다 나 자신이여. 부디 우리들이 선 땅에서 힘없고 연약하며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행복과 복지의 언덕에 다다를 때까지 그대 선 고난의 터에서 두 발바닥 굳게 딛고 ‘그날’까지 정직하고 성실하게 임하길 다짐하고 권하는 바입니다.

P.S 하늘과 땅을 향해 듣는 귀를 열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