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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나루에서 나루는 강이나 바다의 좁은 물목에서 배가 사람이나 짐을 건너게 해 주던 곳, 곧 나루터를 뜻합니다...

ree610 2026. 7. 2. 07:06

삶의 나루에서

1. 나루는 강이나 바다의 좁은 물목에서 배가 사람이나   짐을 건너게 해 주던 곳, 곧 나루터를 뜻합니다.

    문학적으로는 떠남과 만남, 건넘과 기다림, 이별과 귀향의 이미지를 품은 아주 아름다운
우리 말입니다.

동검도 채플은 세상의 소음에서 하느님의 침묵으로 건너가는 작은 나루입니다.

나루는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닙니다.

머무는 듯 보이지만, 실은 건너기 위해 잠시 서 있는 자리입니다.

그곳은 끝이 아니라 다음 길로 넘어가기 위한 기항지이며, 익숙한 세계가 조금씩 힘을 잃고 낯선 세계가 조용히 우리를 부르는 경계입니다.

어쩌면 나루란,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세계가 서서히 물러나고,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가 우리를 향해 조용히 손짓하는 가장 미묘한 장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긴 세월 동안 이 나루와 저 나루 사이를 오가며 살아왔습니다.

서둘러 건넌 날도 있었고, 두려워 머뭇거린 날도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발을 떼지 못한 채 오래 서 있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삶을 이끌어 왔다기보다 삶이 저를 여러 나루 앞에 불러 세웠다는 말이 더 정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2. 이제 남은 세월이 눈앞에 보이는
나이에 이르러
삶의 나루에서 조심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낯선 얼굴로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익숙한 것 안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언어, 정리된 사유, 안정된 신앙의 형식 안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저를 붙들어 주지 못하는 때가 종종 찾아 왔습니다.

확신은 흔들리고, 설명은 힘을 잃고, 제가 의지하던 질서들은 조용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저는 제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일사의 사소한 상식들마저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 깨닫고, 스스로 놀랄 때가 많습니다.

시원찮은 종교인으로 한 생애를 살다가 가는 사람으로서, 저는 한 가지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에게 신앙마저도
경외심을 잃은 지나친 확신이 되면, 그것은 은총이 아니라 독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야 저는 “나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익숙한 세계가 무너진 틈 사이로 예기치 않은 빛이 언뜻언뜻 스며든다는 사실입니다.

그 빛은 거창한 계시의 번개가 아닙니다. 너무도 평범하여 오히려 보지 못했던 사소한 진실의 흔적입니다. 크게 외치는 빛이 아니라, 조용히 스며드는 빛입니다.

3. 문학은 물론이고, 제가 살아오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 때로는 불행처럼 다가왔던 많은 역경들마저도 지나고 보니 은총의 통로였음을 이제 조심스럽게 고백하게 됩니다.

그 모든 만남과 시련은 저를 낮추고, 흔들고, 다시 묻게 하며, 마침내 하느님께로 조금씩 건너가게 한 또 하나의 나루였습니다.

문학은 제게 이 체험을 더 선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엔도 슈사쿠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견디는 침묵의 장면들은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세계에서 하느님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명쾌하게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무너지고 부서진 인간의 자리에서, 거의 사라진 듯한 침묵 속에서 겨우 감지될 뿐입니다.

절망에 가까운 어둠, 의미가 모두 사라진 듯한 순간,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오히려 더 깊고 더 조용하게 빛났습니다.

그 빛은 눈부신 광채가 아니라, 꺼지지 않는 미세한 숨결과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알게 됩니다.

진리는 밝음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오히려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더 또렷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레이엄 그린의 인물들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흔들리고, 도망치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 무너짐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어떤 중심이 있습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어둠 속에서 오히려 더 뜨겁게 살아 있는 연약한 불씨의 온기를 보여 줍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확신이 완전히 붕괴된 자리에서 새로운 인식의 문이 열릴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을 통해 저는 진리가 강한 빛으로 몰려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미세한 떨림으로 스며든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붙잡고 있는 모든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  인류의 선지식들의 말씀을 이제사
조금은 알 듯 합니다

4. 일생동안 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언제나 낯섦을 체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행위가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 앞에 조심스럽게 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붓을 들 때 저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려 합니다. 그러나 정작 화면 위에서는 제가 의도하지 않았던 색과 선과 빛이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저는 그림을 완전히 지배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그림이 저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림은 제게 소유가 아니라 만남이었고, 제작이 아니라 응답이었습니다.

그 낯섦은 늘 불안이었습니다.

익숙한 구도는 무너지고, 익숙한 색은 더 이상 저를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손은 흔들리고, 생각은 막히고, 화면은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막막함 속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계획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제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조용히 떠올랐습니다.

그 결과 그림은 제게 겸손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술가는 모든 것을 알고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세계 앞에서 끝없이 헤매며 찾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며 저는 기다림을 배웠습니다. 형태를 배운 것이 아니라 침묵을 배웠습니다.

빛을 다루려 한 것이 아니라, 빛 앞에 머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제게 낯선 세계를 정복하는 일이 아니라, 그 낯선 세계가 저를 변화시키도록 허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낯섦을 통하여 저는 신앙도, 예술도, 삶도 결국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건너가는 것임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5. 물론 저는 아직도 그 뜻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진리는 설명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어느 순간 사건처럼 우리를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왜 낯섦 속에서 드러나는 것일까'이 질문을 저를
당황케 합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때로는 너무나 쉽게 드러났습니다
'지극한 익숙함' 속에서는 더 이상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익숙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멈추게도 합니다.

이미 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묻지 않는 곳에는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익숙한 얼굴로 오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익숙한 모습으로 오면, 우리는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틀 안에 가두어 버릴 것입니다.

진리는 잠든 우리의 의식을 흔들기 위해 옵니다.

확신을 내려놓게 하고, 굳어진 질서를 깨뜨리며, 다시 묻게 만듭니다. 그래서 진리는 언제나 낯선 얼굴로 다가옵니다.

진리는 정보가 아니라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소유하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의 말씀은 이 낯섬으로
기득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선언은 지금도 여전히 낯섭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으며,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본다는 말씀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낯선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낯섦 안에 복음의 깊은 빛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그러했습니다.

그분은 익숙한 힘의 길을 걷지 않으셨습니다. 낮아짐의 길, 섬김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낯섦 속에서 우리는 참된 하느님의 얼굴을 조금씩 알아보게 됩니다.

저에게 신앙도 그러했고, 예술도 그러했습니다.

익숙한 자리에서는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낯선 자리에서만 무언가가 시작되었습니다.

진리는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아름다움은 그 안에 진리를 품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제 생애는 이 낯섦 속에서 번뇌하고, 경외하고,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를 향해 다리를 절며 조금씩 건너온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제 삶은 끝없이 이어지는 나루의 연속입니다.

저는 여전히 그 나루 앞에서 망설입니다. 지극히 익숙하면서도 지극히 낯선 제 삶의 나루에서,

화려하게 피었던 채플 앞 장미가 마지막 시든 꽃 잎을 달고 초라하게 서 있습니다.

떨어진 꽃잎들은 자신을 활짝 피워 준 그 낯익은 나무의 발치에 고요히 내려와 있습니다.

스치는 바람에 흔들리는 그 꽃잎들의 비감이 아직도 제게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진리가 모순의 극치를 견디는 나무이고, 사랑은 그 모순의 신비를 드러내는 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검도 채플은 오늘도 그 작은 나루로 서 있습니다.

세상의 소음에서 하느님의 침묵으로,
익숙한 나에게서 낯선 은총의 세계로,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품으로 건너가게 하는 조용한 나루로 서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만남은 오늘도 무한한 신비로 가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