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진정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은가.
- 조광호 신부
신앙은 위로가 아니라, 세상에 댜한 책임이다.
1.
며칠 전, 독일에서 오랫동안 학생 사목을 하시던 한 수녀님을 뵈었습니다. 어느덧 사십 년 세월이 지나, 풍상이 얼굴에 고요히 내려앉은 초로의 수녀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수녀원에 지원자가 줄어드는 일과 교회 안에 신자가 감소하는 일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더 깊은 걱정은 숫자의 감소가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이 격변하는 시대에 사람들의 아픔을 향해 더 넓게 문을 열기보다, 오히려 더 두껍게 문을 닫아 가는 것 같다는 걱정이었습니다.
또 수녀님은 한 신학생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착실하던 신학생이 사제 서품을 바로 앞두고 사제의 길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깊은 상담 끝에 그가 남긴 한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교회 공무원처럼 사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는 사제직의 위험을 제대로 보았구나.
그리고 씁쓸한 여운이 남았습니다.
한 젊은이가 사제직 앞에서 “교회 공무원”이라는 말을 떠올릴 만큼, 그만큼 교회가 어느새 관공서처럼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사제는 자칫하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교회 공무원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해진 일만 하고, 주어진 시간만 채우고, 맡겨진 직무만 무리 없이 처리하는 삶입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미 뜨거운 복음의 불이 꺼져 있을 수 있습니다. 삶의 연민이 사라지고, 세상에 대한 책임이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지난 일이지만, 제가 학교에 재직할 때 새로 서품된 신부님이 교목으로 부임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젊은 사제였기에 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사목의 길을 열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예술대학에서 신앙과 예술과 삶이 만나는 프로그램을 함께 기획하고 싶었습니다. 사목 자금은 제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 테니 함께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런 일에는 취미가 없습니다.”
그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물론 모든 사제가 같은 방식으로 사목할 수는 없습니다. 은사도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그러나 그 말 안에는 복음의 모험을 피하려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세상의 아픔 속으로 들어가는 부담을 피하려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공무원이라는 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참된 공무원이라면 백성의 삶을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연구합니다. 문제는 직무의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책임은 최소한으로 하고, 안락은 최대한으로 누리려는 태도입니다.
2.
사목자는 단순히 교회 운영을 위해 파견된 교회 공무원이 아닙니다. 사제는 예수님의 마음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세상의 고통을 보면서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가난, 외로움, 병듦, 절망, 버려짐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기가 꺾인 사람을 보며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헤매는 사람들을 보며, 자기 안에 예수님의 연민이 다시 깨어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위험은 사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의 모든 신앙인에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의 이름으로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길로 세상에 책임지기를 두려워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은 쉽게 안락한 종교 생활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제자는 결코 신부나 수녀나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예수의 제자입니다.
다만 참된 제자는 예수의 이름으로 위로받는 데 머물지 않고,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에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위로와 평화만을 구하는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예수의 기쁜소식을 잘못 전해 들은 것입니다.
그런 설교와 강론은 교회를 복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종교심리 위안소로 전락시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은 우리를 위로합니다. 지친 마음을 붙들어 주고, 무너진 영혼을 일으켜 세우며, 절망의 밤을 지나게 합니다. 그러나 위로만을 구하는 신앙은 복음의 깊은 자리까지 이르지 못합니다.
신앙이 자기 평안만을 위한 도구가 될 때, 그것은 변형된 또 다른 이기심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의 가장 깊은 문제 가운데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사랑의 본질은 어떤 형태로든 책임으로 그 불꽃이 발화되고야 맙니다.
사랑은 감정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사랑은 끝내 누군가를 책임지는 마음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기도하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만 하고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의 길을 온전히 걷는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일만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쉽게 자기 의로움과 분노가 되고, 활동 없는 기도는 쉽게 자기 위안과 경건한 도피가 됩니다.
제자는 먼저 주님 곁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분의 시선을 익히고, 그분의 숨결 안에서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기도 안에서 받은 마음을 들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상처 입은 사람 곁으로, 기가 꺾인 사람 곁으로, 외로운 사람 곁으로, 버려진 사람 곁으로 갑니다.
기도는 제자를 하느님께 묶어 주고, 일은 제자를 세상 속으로 파견합니다.
기도는 사랑의 뿌리이고, 일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기도는 제자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고, 일은 그 불꽃이 누군가의 삶을 따뜻하게 하도록 합니다.
그 시절그 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고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됨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예수의 제자는 그 무엇보다도 예수의 마음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그 사랑의 불꽃에 함께 점화된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와 함께 불타는사람입니다.
그 마음에 붙잡혔기에, 그는 기도하고 일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열두 제자들은 모두 달랐습니다. 어부도 있었고, 세리도 있었고, 열혈당원도 있었습니다. 성격도 달랐고, 생각도 달랐고, 살아온 길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불림을 받았고, 다시 세상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제자는 교회 안에 안전하게 머무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는 주님 곁에 머물다가 다시 사람들 곁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삶 안에서 그 마음을 책임으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다시 그 두 손으로 상처를 싸매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 세상 앞에 몸을 굽혀 섬기는 사람입니다.
4.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를 야전병원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복음적인 말씀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성채가 아닙니다. 교회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며, 더 나아가 상처 입은 사람들을 찾아 나가는 곳입니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피 흘리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상처를 싸매 주는 곳,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야전병원이라면, 제자는 그곳에서 상처를 닦고, 붕대를 감고,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자기 보존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가 자기 체면과 질서와 안전만을 지키려 할 때, 교회는 야전병원이 아니라 닫힌 관청이 됩니다. 사제가 예수님의 연민을 잃어버릴 때, 그는 복음의 봉사자가 아니라 종교적 행정가가 됩니다.
예수의 제자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교회 자체를 마지막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파견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교회를 통해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세상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과 마음과 재능과 재산, 그리고 자기 생애 전체를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랑과 자비가 메마른 도덕주의자가 아닙니다. 종교적 초월의 추상세계에서 홀로 도를 닦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늘만 바라보며 땅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땅 위의 사람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 곁에 서는 사람입니다. 기가 꺾인 사람들의 숨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외로운 이들의 곁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무너진 이들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보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자신을 불태우는 사람,
예수의 제자는 이 시대의 숨은 순교자가 됩니다.
그는 자기 몸과 마음과 재능과 재산, 그리고 자기 생애 전체를 자기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 거저 받은 선물임을 알기에, 그는 그것을 움켜쥐지 않고 다시 세상에 내어놓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자리에서, 그 소임이 어떤 일이든 그는 자기 생애를 남김없이 불태웁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박수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는 하느님만 아시는 자리에서 조용히 사람을 살립니다.
피를 흘리지 않아도 순교일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히지 않아도 순교일 수 있습니다. 칼날 앞에 서지 않아도, 매일 자기 안의 이기심을 죽이고 세상의 고통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삶은 이미 순교의 길입니다.
그는 기가 꺾인 사람 하나를 다시 일으킵니다. 외로운 사람 하나의 곁을 지킵니다. 절망한 사람 하나에게 다시 살아갈 이유를 건넵니다. 그렇게 자기 생애를 조용히 소진합니다.
5.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씀은 제자도의 가장 깊은 핵심입니다. 우리는 조건 없이 사랑받았습니다. 조건 없이 용서받았습니다. 조건 없이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받은 은총을 자기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그는 조건 없이 받은 사랑을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으로 다시 흘려보냅니다.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하고, 위로를 받았기에 위로하며,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을 냉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자기 위안의 장소로만 삼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의 상처와 가난과 분열과 외로움 앞에서, 작게라도 응답하려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가까이 부르십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의 이름으로 나 자신만 위로하고 있는가.
나는 교회 안에 머물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로 세상 속으로 파견되고 있는가.
참된 신앙은 위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책임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도, 이미 하느님 앞에서는 이 시대의 숨은 순교자입니다.
그는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조용히 타오르는 사람입니다.
그가 타는 자리에서 누군가는 다시 따뜻해지고, 누군가는 다시 일어서며, 누군가는 다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느낍니다.
그 작은 불빛들이 꺼지지 않는 한,
세상은 아직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평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