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에 아들이 예전에 내가 쓴 글 하나를 찾아 보내왔다. 1993년 5월 『빛과소금』 서언에 실렸던 글,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아들에게 쓴 편지였다.
제목은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였다. 사실은 나 자신이 "좋은 아빠"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썼다.
벌써 33년 전(45살 때)입니다. 그때 중3이던 아들은 이제 40대 중반을 넘어 50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아들의 아들도 중학교 3학년입니다. 세월이 정말 살같이 흘렀습니다.
아들은 나의 옛날 편지를 자기 아들과 한줄 한줄 함께 음미하며 읽었다고 했습니다. 아들과 손자가, 아버지이자 할아버지가 오래전에 쓴 글을 함께 읽고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올라왔습니다.
33년 전, 나는 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도했습니다. 삶의 환경보다 하나님이 더 크신 분임을 기억하라고,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기억하라고 썼습니다.
그 오래된 편지가 다시 아들과 손자에게 읽혔다는 사실이 참 고맙습니다. 신앙은 한순간에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압니다. 편지 한 장, 기도 한 줄, 삶의 기억 하나가 세월을 지나 다음 세대의 마음에 닿습니다.
신앙의 전승은 내가 이루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조용히 엮어 가시는 은혜입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2026년 6월 6일 김지철 목사
- 전문을 올립니다(김지철,『빛과 소금』의 생각 1993년 5월)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네가 갓 태어났을 때, 아빠가 지녔던 당혹스러운 기쁨을 너는 상상할 수 있겠니? 한편으로는 '야호' 소리치며 환호하고 싶은 심정과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쑥스러운 마음이 교차되던 그 헛갈리던 마음 말이다. 노총각 문턱에서야, 서른 살 되던 해에 네 엄마를 아내로 맞이했을 때, 이 아빠의 마음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았지. 그러나 그걸 내색하는 것은 어쩐지 부끄러운 일만 같아 혼자 속으로만 삭히며 좋아했단다. 다만 지혜로운 내 짝꿍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신혼여행을 갔다 오자마자 네 엄마가 너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아빠가 왜 그렇게 어색하고 부끄러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구나.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참으로 기다려지고 자랑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으나, 나 같은 놈이 벌써 아빠가 된다는 것이 어쩌면 조금은 어색하고 왠지 모를 미안한 감정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빠와 엄마는 신혼의 삶을 시작하면서 태어날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너의 이름을 네가 생기기도 전에 지어 놓고 말이다. 그때 아빠는 세례 요한을 생각했었지. 예수님을 준비한 사람,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 불렸던 사람,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이 주님에게로 갈 때에도 그것을 기쁨으로 권면한 사람, 이 세상의 악을 거절하고 불의하게 권력과 부를 누리는 자의 죄악을 고발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고 자기 몸으로 선언한 사람, 요한 말이다. 그래서 네 이름 속에 의(義)를 넣고, 그것을 빛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혁(爀)을 넣었단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이 너무 강한 것은 아니냐고 묻기도 했지만, 그런 아빠 엄마가 바란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단다. 하나님이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 되길 원한 것이지.
네가 드디어 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고 신호를 보냈을 때, 아빠는 참 당황했단다. 네 엄마가 자연분만이 안 되어서 약물을 투여받고 다시 진통이 시작되어 너를 낳게 됐을 때는, 진통을 시작해 병원에 입원한 지 만 하루가 넘은 후였으니까. 엄마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생명을 잉태하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다만 병실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네 엄마와 너를 지켜보면서 안절부절하는 마음을 달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단다.
마침내 네가 이 세상에 나와 힘찬 고성을 지르는 순간, 아빠는 깊은 안도의 숨과 함께 가슴속 깊이 얼마나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렸는지 모른단다. 네가 눈을 꼭 감고 새근새근 잠자며, 그러다가 이따금씩 방긋 미소를 지을 때면, 아빠는 생명의 고귀함을 깨달으며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곤 했지. 네가 점점 자라가며 '까륵까륵' 웃기도 하고 재롱을 부릴 때는 아빠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다 사라지는 것도 같았단다. 하루에도 수없이 안아 주고 뽀뽀해 주고 비벼 주는 것을 통해서 아빠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그제야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깨달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곤 했단다. 어쩌면 너를 주신 것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한 것이 아니었나 감사드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너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진함에 있어서는 아빠가 엄마를 당할 수 없었던 것 같구나. 네가 밤중에 보채고 울어대면 사실 아빠는 깨어 일어나 너를 달래주기보다는 단잠에 빠져 결국 그 일은 항상 엄마의 역할이었으니까 말이다. 하루의 일과로 파김치처럼 축 늘어진 피곤함 중에도 짜증 내지 않고 너를 안아 주고 젖을 주며 기저귀를 갈아 주었던 것은 네 엄마였지 아빠가 아니었단다.
사실 아빠는 네게 사랑을 베풀어 준 것보다는 너를 통해 받은 위로와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구나. 너의 해맑은 천진난만함과 지금까지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 준 모습 자체만으로도 아빠에겐 큰 효도요 더없이 큰 기쁨의 선물이 되었단다.
아빠가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사실 너무나 힘들었고 어려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강의실과 도서관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매일매일 마음이 무거운 부담을 느낄 때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삶에 늘 새 활력을 불어넣어 줬던 것은 너와 네 동생 의경이의 재롱이었단다. 함께 집 안에서 씨름도 하고, 밖에서 공놀이와 자전거를 타며 뜀박질을 할 때면 모든 마음의 찌끼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빠의 공부와 생활은 너무 삭막하고 재미가 없었을 거야.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는 외국 아이들 속에 자라면서도 유독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한 자에겐 너그러웠지. 힘센 애가 약한 애를 못살게 굴고 장난치면 너는 말리고, 너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이라도 잘못하면 대들고 항의했지. 아빠는 너의 그런 모습을 대견스럽게 바라보곤 했단다. 비록 어렸지만 아이들과 함께 놀다 어떤 아이가 다른 애들에게서 소외되면 그 아이를 먼저 찾아가서 놀아 주며 친구가 된 것도 바로 너였단다.
이제는 네가 벌써 중학교 3학년이구나. 어느새 코밑에 가무잡잡한 솜털 수염도 나고, 여드름 걱정을 하는 사춘기의 소년, 아니 청년이 되었구나. 가슴팍에도 못 미치는 이 꼬마가 언제 클까 생각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벌써 아빠가 우러러볼 만큼 네 키가 자랐구나. 아빠는 제 키가 그렇게 자란 것만큼 네 마음도, 생각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에 있어서 더 깊어지고 성숙되기를 기도해 본단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이제 너는 인생에 있어서 또 한 번의 중요한 시기에 들어서게 된 거란다. 또 한 번 새롭게 태어나는 제2의 탄생을 경험하는 시기이지. 네가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엄마가 고통을 당했지만, 이제는 네 자신이 너의 모습을 형성하기 위해 부단히 몸부림쳐야 하고 애써야 하는 때가 온 거란다. 성장과 성숙이란 그냥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아마도 때로는 갈등하며 번민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를 지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항상 생의 궁극적인 답을 깨닫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진지함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을 알려 주고 싶구나. 그때 필요한 것은 모든 사물을 대하는 자기 개방성과 자기 비판성을 지니는 것이란다. 너무 어려운 말인지 모르겠구나. 두고두고 음미해 보길 바란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의 삶의 여정에서 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단다. 우리가 부딪치는 환경과 여건의 문제보다 우리 하나님은 더 큰 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불러 주시고 그분의 창조적인 섭리에 동참케 하신 분 말이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시는 것보다 너와 아빠를 더 사랑하신 우리 하나님, 그리고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시고(요 14:6), 인생을 사는 모든 보화와 능력과 소망(골 2:3)이 그분 안에 담겨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늘 기억하는 일이다.
부디 하나님의 사람으로 커다오.
'93년, 너를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하면서
아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