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늦은 애도, 양용의 교수님을 기리며: 양용의 교수님이 돌아가셨다.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빈소를 차리지 말라는 유언대로

ree610 2026. 5. 18. 09:15

너무 늦은 애도, 스승의 날에, 양용의 교수님을 기리며:

양용의 교수님이 돌아가셨다.
당신의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처럼
빈소를 차리지 말라는 유언대로 장례는 가족과 교인들로만 조촐하게 치러졌다.
당신의 40년이 담긴 장소,
강릉의 <농촌목회연구원>이 있는 보광교회 곁에 수목장으로 안치되었다.
그날 저녁 교인들과 지인들이 마련한
<추억예배>로 그분의 삶을 따스하게 기리며 감사했다.

양용의 교수님은 우리 부부의 주례를 서주셨다. 당신 생애 첫 주례라서 참 정성을 기울여 준비해주셨다.
영국에서 공부하던 중 잠시 나와 결혼하고 들어가는 어수선한 와중이었는데도 참 잘 대해주셨다.

양용의 교수님은 나의 성경 선생님이셨다.
에스라성경연구원 시절 1년 동안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잘 배웠고,
그 전에 내가 몸담고 있던 광야교회(윤종하 장로)에 거의 한 식구처럼 자주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셨다.

양교수님은 나의 LBC 선배이셨다.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굳이 BA부터 다시 한다고 했을 때,
자신의 그 시절 노트까지 꺼내어 보여주시면서
세세하게 그 어렵다는 LBC의 BA 과정을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다.
나도 박득훈 목사님처럼 담임 목회를 하면서 공부를 해야 했기에
양교수님의 조언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양용의 교수님은 나의 저자이셨다.
성서유니온에 입사하여 <하나님 나라>에 관한 국내 저자의 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당시까지 시중에 나온 150여 권 가량(번역서 포함하여)의 하나님 나라, 천국, 천당에 관한 책을 다 살펴본 후
각 책의 장단점을 파악한 보고서를 쓰고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 나라> 책에 대한 기획서를 만들어 양교수님께 제안하였다.
그래서 나온 책이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나중에 그분의 후배로 LBC(London Bible College)에서 공부하면서
막스 터너의 수업을 들을 때 이 책 만든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교수님은 이후에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리즈를 기획하였을 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히브리서 집필을 맡아주셨다.
현장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는데, 각주를 최대한 줄여 달라는 나의 부탁이 나중에 표절 논란의 빌미가 될 줄은 몰랐다.
큰 괴로움을 겪으셨고, 평생 사심없이 사셨던 삶에 큰 상처를 입으셨다.

양용의 교수님은 부모님의 좋은 이웃으로 사셨다. 양용의 교수님은 문막에서
나의 부모님과 누이와 함께 한 마을을 형성하며 사셨다.
최근에 이사하시기 전까지 친구 박득훈 목사님과 나란히 집을 지어서 사셨다.
연로하신 우리 부모님에게 말씀의 꼴을 먹여주셨고, 말 동무가 되어 주셨다.
양교수님의 몸에 이상함을 맨 처음 감지하고 응급실로 옮긴 것도 세브란스 의사로 있는 나의 누이였다.
그때 이미 종양의 위치가 너무 안좋아서
위험하다고 누이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지난 구정에 마지막으로 뵈었다.
소년처럼 순수한 얼굴이었다.
말씀도 어눌하셨고, 종양이 해마를 누르고 있어서 기억력이 몹시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도 어린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나의 방문을 무척이나 반겨주셨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다.

구례 출신이다. 교육열이 높은 부모님 덕분에 중학교를 서울에서 다니셨다.
좋은 중학교를 가려고 재수를 했는데,
그때 하필 중학교는 평준화가 되어
당시에는 명성이 좋지 않은 '용문중'을 갔다. 그런데 고등학교는 당시에 명문인 경복고에 진학하셨다.(평준화가 한 번은 자신에게 절망을, 다른 한번은 기쁨을 주었다고 하셨다)

이미 진로를 신학교 교수가 되는 것으로 정했기 때문에 대학을 총신대학교로 진학하셨다. 당시에 총신대는 성적에 따라 A반과 B반으로 나눠져 있었고,
교수님은 성적이 좋은 편에 속해서 공부하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교수님 학번의 동문들이 국내에서 가장 많은 신학교 교수를 배출한 기수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당시에 총신대학교에
대단한 해직교수들이 많이 오셔서 탁월한 강의와 멘토링을 해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특히 손봉호, 이만열 교수님이나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중에 경기대 총장이 된 어떤 교수님에게서도 많은 배움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때를 회고하시면서 좋은 스승이 얼마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경험했다고 하신다. 그 어려운 시절에 동기들이 유학의 꿈을 품고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승들이 심어준 자신감 덕분이었다고 회고하셨다. 프란스 교수님과 막스 터너, 그리고 나중에 절친이 된 맥마스터의 스탠리 포터 교수님을 특히 자주 언급하셨다(포터 교수님은 나중에 사위 안호준 목사의 지도교수가 된다).

학부 때 양교수님은 당시에 선교사들과도 교류를 하면서 영어를 익혔다고 하신다. 그래서 손봉호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학부 논문을 영어로 쓰기도 하셨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총신대학원에 진학하는 대신에 출판사에서 영어를 번역하는 일을 하면서 유학을 준비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London Bible College에
그 어렵다는 BA 과정에 입학하셨다.
아마 1983년 쯤 되었을 것이다.
그때 함께 입학한 분이 나이로는 2살 6개월 더 많은 박득훈 목사님 이셨고 (박목사님은 킹스크로스한인교회 담임까지 같이 맡으셔서 양교수님께 공부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회고하신다)
그 아래 기수로는 당시 OM의 선교사였던 최종상 선교사님이 계셨다.
그 선배로 한국인으로서는 김북경 목사와 이승장 목사 정도가 계셨다고 한다. 이때 만난 스승 R.T.Franc는 평생의 스승이요 멘토가 된다.

BA(영국의 이 과정은 한국의 M. div에 해당한다)를 마치고 귀국하여, 놀랍게도 BA 학위만 갖고서 개혁신학원의 교수가 되는데, 이는 손석태 교수의 추천이 있었다. 손교수님이 "영국 BA는 한국의 어지간한 박사 학위보다 어렵고 대단하지!" 말씀해주셔서 교수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하셨다. 30대에 신학교 교수가 되어 가르치면서 도리어 당신께서 많이 준비하고 배울 수 있었다고 하신다.

이 기간 강릉 보광교회 곁 컨테이너에 살면서 제자들과 함께 강릉의 무교회지역 탐방을 하며 무교회지역 지도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곳에 교회를 개척하도록 격려한다.
그 제자들과 함께 <농촌목회연구원>을 만들어, 매주 같이 공부하면서 그들을 준비시키고 외롭지 않도록 격려한다.

그리고 공부를 더 할 계획을 갖고 LBC에 MA 과정에 들어간다. 거기서 막스 터너라는 좋은 신학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 무렵 옥스퍼드의 위클리프 홀의 학장으로 옮긴 프란스 교수의 부름을 받고 옥스퍼드에서 박사 학위를 시작한다.
그의 주제는 '안식'이다. 이는 분명 그가 오래 전부터 교제한 성서유니온의 윤종하 장로의 '안식'에 대한 강의와 고민에 영향을 받았다. 프란스 교수의 격려도 컸다.
거기서 빠른 시간 안에 학위를 마친다.
당시 위클리프 홀은 옥스퍼드 대학 안에 속하지 않았기에
그의 학위는 '코벤트리대학교'에서 받는다.
(옥스퍼드 대학 안에 있는 칼리지들은 매년 심사를 받아서 옥스퍼드 대학교 안에 머물 것인지 떠날 것인지를 결정한다)
당신은 그것 때문에 오히려 학비가 싸서 좋았다고 하신다.

귀국할 즈음에 <에스라성경연구원>이 설립된다. 사전에 깊은 교감이 있었다.
그래서 에스라성경연구원 안에 아예 온 가족이 머물 숙소까지 제공하면서
윤종하 원장과 함께 에스라성경연구원의 산파 역할을 하셨다.
그리고 연구원이 대학원대학교가 되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젊은 시절을 이 학교에 다 바쳤다.
다만 이정석 교수와의 우정 때문에 내내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와 <개혁신학교>에서도 강의를 하셨다.

나는 양용의 교수님을 몇 가지로 정의한다.

1. 선교사, 선교사들의 스승

그는 신학교 교수 시절에 받은 농촌목회를 향한 자신의 소명을 소천하는 그 무렵까지 이어가셨다. 처음에는 강릉에서 사셨지만, 나중에 에스라 교정에서 머무는 무렵에도 매주 강릉을 오가셨다. 거의 30년 가까이 이 루틴을 이어가셨다. 대단하지 않은가? 지금이야 도로가 잘 닦였지만, 그때는 대관령 고개를 넘어서 다니셨다. 나도 몇 번 가봤는데, 이 먼 길을 어떻게 매주 다니셨을까, 하고 놀랐다. 더욱이 영국에서의 안온한 삶과 대조적으로 강릉의 숙소는 컨테이너였는데도, 그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신 것을 보면서 그분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FIN 선교회가 있다. 전세계에 오지 선교를 하는 곳이다. 이 선교단체가 한국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농촌목회연구원>이다. 더는 우리가 할 일이 없다고 판단했으며, 이 선교회가 한국에 <생명의말씀사>라는 출판사를 넘겨주고 떠났다. 이 선교회의 한국 사역자가 미국 어드만 출판사의 소유자 가족인데, 떠나면서 원서를 많이 선물하고 가서 큰 도움을 받았다면서 좋아하셨다.
그는 은퇴 이후에도 강릉을 정기적으로 찾으셨고, 박득훈 목사님과는 태백에 있는 목회자들을 찾아가 도우셨다. 그분의 마지막 사역이 태국과 방글라데시 선교지 탐방이었다. 누이는 이 한 달 동안의 여정이 너무 무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도 선교사들의 스승으로서 양교수님과 어울리는 마무리였다고 생각한다.

2. 학자

말할 것도 없이 그분은 훌륭한 학자이셨다. 국제적인 논문 발표 자리에도 자주 초청 받으셨는데, 너무 품이 많이 들어서 더는 수락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하셨다. 복음서 연구에서 시작하여 히브리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연구의 영역을 넓혀가셨다. 특히 그의 <하나님 나라> 강의나 책은 90년대와 2000년대에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 개념을 바로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분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책을 쓰실 때, 한국 저자의 책 중에 읽을 만한 것은 김균진 교수님의 책 정도였다. 나는 그의 박사 논문인 <안식>의 의미를 좀더 발전시켰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그 논문 끝에 한국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챕터를 강하게 요구하여 넣었다고 하셨는데, 프란스 교수가 난색을 표하셨다고 한다. 그만큼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머물기를 원치 않으셨던 그분의 면모를 알 수 있다.
한국에 한참 표절논란이 일었을 때, 그 시작이 된 책이 <마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였다. 그 책의 기획을 함께한 사람으로서 책의 집필 의도에 충실한 그분의 책이 그런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너무 죄송했다. 학문적인 연구서가 아니라, 큰 세계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위한 입문서로 기획하였고, 따라서 의도적으로 각주를 많이 생략하였는데, 그게 화근이 될지 몰랐던 것이다. 이 후 나온 그의 논문들이나 마태복음 주석 등을 볼 때, 그의 학문적인 역량을 의심할 여지는 전혀 없다. 학자로서의 그의 자존심에 상처가 난 것은 두고두고 마음 아픈 일이며, 그로 인한 충격과 스트레스가 이 종양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마음이 쓰린다.

3. 번역자와 저자

양용의 교수님은 영어에 매우 능통하셨다. 영국 학교에 남아 있는 그분의 영어 논문과 에세이들을 보면서 많이 놀랐다. 통역도 유창하게 잘 하셨다. 번역도 많이 하셨다. 워낙 꼼꼼한 성격이라서 편집자가 손 볼 것이 별로 없을 만큼 글도 잘 쓰셨다. 늘 책상에 국어사전을 두면서 당신께서 손수 글을 점검하셨다. 그가 남긴 저서들은 하나같이 오래 서재에 두고 참고할 만한 수작들이다. 앞으로 쓰고 싶은 책이 많았는데, 너무 일찍 떠난 것이 아쉽지만, 교수님의 사위 안호준 박사(침신대)가 그 모든 책들을 다 물려받아서 그 연구의 길을 이어가리라 기대한다.

4. 목사들의 목사, 지역교회 성도, 할아버지

양용의 교수님은 참 좋은 학자이셨지만, 동시에 교회를 사랑하는 목사였다. 그의 생애 말년에 문막의 새동네교회에서 교인으로서, 할아버지로서 평범하게 살아가시고, 강원도의 사역자들을 돕고, 새동네 교회 젊은 목회자를 멘토링하시는 등 그는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목사로서의 삶을 일관되게 살다 가셨다. 에스라에서도 목회 중에 재교육을 위해 입학한 목회자들에게 참 따스한 스승으로 사셨다.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서 농담하며
쉽게 다가가서 친해지기는 어려웠다.
늘 예의를 갖춰서 깍듯이 대해야 할 것 같은 분이었다. 좀더 허물없이 다가가 어려운 얘기도 나누며 지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아주 젊은 나이에 개혁신학원 교수가 되면서 스승의 자리에 너무 오래 있어서인지 권위주의적이지 않은데도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래도 박득훈 목사님이 곁에서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시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너무 귀한 분이 너무 홀연히 떠나셨다.
지나칠 만큼 깔끔하게 있던 자리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다.
그것이 서운할 정도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지키며 살고 싶었던 교수님의 가르침대로, 바람대로 가신 것 같아
수긍이 된다.

2026년 스승의 날!
이제 찾아뵐 스승이 몇 분 안 남으셨다.
윤종하, 송용석, 김북경, 양용의...다 떠나셨다.
여수에 황정길 목사님이 계셔서 찾아뵙기로 했다.
이 소중한 분들의 귀한 삶에 누가 되지 않도록 살기로 다짐해본다. 평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