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예근성! – 두려움이 만든 생존방식
* 말씀: 출애굽기 14장 11절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이 내뱉은 말은 놀랍게도 ‘찬양’이 아니라, ‘무덤’이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이 장면은 씁쓸하고도 적나라하다. 하나님은 노예를 자유인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그 변화는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유에는 대가가 있고,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해방의 문턱에서 드러나는 것은, 구원의 기쁨보다 더 깊게 뿌리내린 노예근성이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출 14:11)
1) 용기 없는 자유는 노예근성으로 되돌아간다.
이스라엘의 질문은 질문처럼 보이지만 실은 비난이다. "매장지(무덤)가 없어서"라는 표현은 단순한 장소 타령이 아니다. 두려움이 신앙의 언어를 점령할 때,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상황을 우상화한다. 홍해는 벽이 되고, 애굽 군대는 절대자가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 도움이 안 되는 분'으로 밀려난다. 용기가 없으면 자유의 여정은 사라지고, 다시 ‘안전한 감옥’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용기이다.
2) 익숙한 종살이 vs 낯선 자유: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노예근성은 몸에 밴 습관, 영혼에 새겨진 생존방식이다. 애굽에서의 삶은 비참했지만 예측 가능했다. 반면 광야의 자유는 약속이 있지만 불확실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차라리 그때가 낫다"는 방향으로 마음이 도망친다. 해방을 꿈꾸던 이들이 해방을 두려워하는 역설, 여기에 노예근성이 있다. 자유로운 책임자가 되기를 기피하고 타인의 탓으로 돌린다.
노예근성은 고통이 멈추면 ‘좋은 하나님’, 위기가 오면 ‘무력한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신앙이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위기관리 시스템으로 축소된다. 몸은 애굽에서 나왔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남아 있다. 진짜 출애굽은 장소 이동이 아니라 정체성의 재구성이어야 한다.
3) 믿음의 용기는 ‘관점의 전환’이다
믿음은 먼저 '상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크게 보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해방의 길목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 사건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만이 아니다. 노예의 시선이 자유자의 관점으로 바뀌는 기적이다. 노예근성은 두려움이 생기면 후퇴한다. 그러나 자유자의 영성은 두려움이 있어도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이 전환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광야는 그 훈련의 학교다. 하나님은 백성을 단번에 완벽하게 만들지 않으신다. 그 대신 반복되는 위기 속에서 '무덤의 언어'를 '약속의 언어'로 경험하게 하신다. 신앙의 성숙은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로 방향을 틀 줄 아는 능력이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해방을 향한 여정에서 드러나는 노예근성은 우리의 부끄러운 고백이다. 하지만 동시에 치유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원망을 통과하여 믿음을 빚어 가신다. 우리의 입이 무덤을 말할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새로운 길’을 준비하신다. 그리고 그 길의 최종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다(요 14:6: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분 안에서 우리는 오늘도 출애굽을 하며 참된 자유의 사람으로 성숙한다.
**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홍해 앞에서 두려워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던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두려움이 커질 때 도망치려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해방을 주신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익숙한 종살이를 그리워했던 뿌리깊은 노예근성을 용서하소서.
십자가와 부활로 죽음의 길목에서 새 길을 내신 예수님,
상황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걸음씩 담대히 내딛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