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길을 떠난다:
누구나 자기만의 보금자리를 꿈꾼다.
비바람을 막아줄 든든한 벽과 지붕은 삶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추운 밖보다는 따뜻한 방 안을 선호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품는 마음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신앙조차 ‘내 집 마련’의 관점에서만 이해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마음의 평안을 구하던 기도가 어느덧 아파트 평수를 넓히는 도구가 되고, 소유의 크기에 따라 신앙의 온도까지 변하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하늘에 소망을 둔다고 말하면서도 땅 위에 찍힌 주소 하나에 온 마음을 뺏기는 모습은, 언젠가 떠날 여행자가 호텔 방에 영원히 살 것처럼 가구를 들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지금 영원한 도성을 향해 걷기보다 이 땅의 먼지 위에 성을 쌓는 일에 더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조용히 묻게 된다.
텐트 속에 머무시는 하나님 미쉬칸(מִשְׁכָּן)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결코 한 장소에 묶인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에게 화려한 궁전을 요구하는 대신, 광야의 먼지를 그대로 받아내는 텐트인 미쉬칸 (מִשְׁכָּן) 가운데 머물겠다고 선언하셨다. 이 거처는 한자리에 고정된 건물이 아니었다. 구름 기둥이 떠오르면 언제든 말뚝을 뽑아 백성의 걸음과 보폭을 맞추는 이동식 성소였다. 하나님은 차가운 대리석 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기보다, 백성과 함께 고단한 길을 걷고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함께 숨 쉬는 길을 택하셨다 (출애굽기 40:34-38).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고여 있는 분이 아니라, 지금도 길 위에서 우리를 앞서 가시는 분이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표현에 쓰인 스케노오(σκηνόω) 역시 장막을 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우주의 주권자께서 언제든 옮길 수 있는 텐트와 같은 육신 속에 머무르기로 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마음의 자유를 선사한다(요한복음 1:14). 진정한 거룩함은 화려하게 지어 올린 건축물에 깃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길 위에서 마주하는 모든 순간이 곧 성소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살아간다.
공간의 거룩한 가치
물론 물리적인 공간이 지닌 쓸모를 무시할 수는 없다.
잘 마련된 공간은 사역의 효율을 높이고 성도들의 교제를 풍성하게 만드는 훌륭한 밑거름이 된다. 예배를 위한 중심 공간뿐 아니라, 소그룹이 모여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방들,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교실, 그리고 지역 주민들과 온기를 나누는 쉼터 같은 다양한 공간은 복음이 스며드는 통로가 된다. 이러한 공간들이 적재적소에 갖춰져 있을 때, 교회는 더 세밀하고 편리하게 이웃을 섬길 수 있다. 다만 그 편리함이 혹시 우리를 세상과 단절시키는 성벽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 사도 바울이 머물렀던 셋집, 미스토마 (μίσθωμα)라는 단어는 소유에 집착하는 오늘날의 태도에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을 보면 바울은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며 자신에게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영접했다(사도행전 28:30-31). 여기서 미스토마는 단순히 '빌린 집'이 아니라 '대가를 지불하며 얻은 임시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기 명의의 권리를 가지려 애쓰는 대신, 매달 셋값을 치르며 얻은 그 권리를 오직 복음을 위해 사용했다. 내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열린 문이 되었고, 복음이 막힘없이 흐르는 거룩한 정거장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공간은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는 플랫폼인가, 아니면 소유를 확인하는 사적인 영토인가.
머리 둘 곳 없는 왕
예수께서 걸으신 길 또한 한곳에 머무는 정착과는 거리가 먼 여정이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당신께는 머리 둘 곳조차 없음을 담담히 밝히셨다(마태복음 8:20). 만왕의 왕께서 이 땅에 자기 명의의 주소 하나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추구해온 안락함이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정착이 주는 안심보다 길 위에서 경험하는 생동감이 복음이 지닌 고유한 힘이기 때문이다.
안정에 대한 집착은 대개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결핍을 안락함으로 채우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신앙은 불안을 없애주는 보험이 아니라, 거친 파도 위에서 주님을 믿으며 나아가는 모험이다. 건물의 벽이 두꺼워질수록 성령의 바람이 들어올 틈은 좁아지기 마련이며, 안정권에 진입했다는 안도감은 종종 영혼의 무기력으로 이어지곤 한다. 튼튼한 성벽은 나를 보호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 마음을 가두는 보이지 않는 감옥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나그네의 영성
하나님 나라가 힘 있게 전해지는 자리는 넉넉한 소유 위가 아니다. 오히려 기댈 곳 없는 약한 마음 위에서 그 나라는 비로소 시작된다. 의지할 담벼락이 사라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품이 가장 분명한 피난처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집 문서의 깨끗함보다 내 영혼의 옷자락이 주님과 동행하느라 적당히 해져 있는지 조용히 살펴본다. 공간을 가지되 그 공간에 갇히지 않는 자유가 우리에게 절실하다.
인생은 결국 길 위의 시간일 뿐이다. 여행자가 호텔 방의 안락함에 빠져 가야 할 목적지를 잊어버린다면 그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을 것이다. 땅 위에 말뚝을 더 깊이 박으려는 욕심에서 벗어나, 주께서 구름 기둥을 띄우실 때 언제든 짐을 꾸릴 수 있는 가벼운 마음을 소망한다. 진정한 평안은 내 집 안방의 안온함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의 손바닥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말뚝을 박고 있는가. 그리고 내일 아침, 주님이 떠나자고 하실 때 기꺼이 그 말뚝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평화 🤔
- 김한원 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