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김대중이 남긴 선물
- 김경집 (전 가톨릭대 교수)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지 반 년을 넘어 1년을 향하고 있다. 기대 이상의 행정력을 발휘하고 있어 안심이다. 경제도, 외교 등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으니 뿌듯하다. 여전히 내란 청산, 검찰과 사법 개혁 등의 과제가 진행형으로 남았지만 문화정책에서는 미흡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한류의 덕을 보고 있고 나름대로 정책을 세운다고 하지만 긴 안목과 담대한 결정은 보이지 않는다.
한류 열풍을 이야기할 때 흔히 놓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치에 관한 것이다. 더 정확히는 정치지도자에 대한 것이다. 진영의 영역을 차치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접근했을 때 나는 1998년에 정치인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취임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 엄청난 득표력으로(꽤 많은 이들이 부정선거가 아니었으면 그가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대의 정적으로 떠오른 그는 다음 해 박정희에 의한 10월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 이후 친북용공세력으로, 때론 노골적으로 빨갱이라는 딱지를 평생 붙이고 살았다. 해외 망명과 일본에서 강제로 납치 압송되는 등 수많은 곡절을 겪기도 했다.
쿠데타와 광주의 시민학살을 저지르고 권력을 쥔 전두환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다행히 국제적 압력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지 27년 만에 그 자리에 오르는 동안 그가 겪은 고초와 위험은 잠시도 그친 적이 없었다.
감옥에서 읽은 책 한 권에서 미래의제를 찾다
정치인 김대중만큼 책을 열심히 읽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장서만 해도 어마어마했으며 형무소에서도 책 읽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형무소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앨런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라고 했다. 그 책을 통해 김대중은 미래가 정보통신혁명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발전할 것이라는 데에 깊이 공감하고 미래의제 탐색에 중요한 지침으로 삼았다. 그 책이 세상에 나온 게 1980년이었는데 그것도 감옥에서 그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쳤다는 건 그만큼 세상을 파악하고 있으며 핵심을 읽어내는 탁견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마침내 그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평생을 꿈꿨으며 그 까닭에 목숨을 위협받는 건 예사였던,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처참한 상태였다. 전임 정부의 미숙함과 기업의 무능과 무분별한 차입을 통한 확장일변도 경영 때문에 외환위기를 겪었고 IMF(국제통화기금)의 혹독한 간섭과 사회 근간을 뒤흔들 정도의 매서운 구조조정으로 인한 피폐한 상황은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꿈꾸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위기와 혼돈의 상태였다. 그에게 맡겨진 일은 앞 정부가 싸지른 걸 치우는 청소부의 역할이었다. 재정은 빈약하고 외부기관의 간섭은 극심했으며 국민의 삶은 불안하고 사회적 기반은 뒤흔들린 상태였다. 유산은커녕 빚만 떠안은 어린 가장과 다를 바 없었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그 위기를 혼연일체의 헌신과 희생으로(물론 대부분 서민의 헌신과 희생이었고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는 기회였을 뿐) 위기는 넘겼다.
김대중은 우리의 미래 선택은 정보통신혁명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디지털로의 과감한 전환이 가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임기 내내 정보화사회의 기반 조성에 힘써 ‘국가정보화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하여 1999년 전국 가구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이 9.6 퍼센트에서 2002년에는 70 퍼센트 이상이 되어 대한민국이 초고속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를 달성할 수 있었다. 즉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인프라를 가진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정부 주도와 민간 투자 유도를 병행하여 KT, 하나로통신, 두루넷 등이 전국 광케이블망을 설치함으로써 향후의 디지털 통신 혁명을 주도적으로 선도할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시급한 일이 많은데 당장 효과를 거둘 수도 없으면서 투자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는 광케이블 통신망 사업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것에 대해 비판했지만 김대중은 거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의제와 먹거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21세기형 디지털 국가 전환의 기초 설계자였으며 인터넷 강국의 토대를 만든 대통령이었다. 그럼으로써 디지털경제로의 전환을 가속화시켰다. 물론 닷컴버블과 같은 부작용도 있었지만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IT산업을 활성화시켰다. 또한 벤처기업을 육성하여 다음, 네이버, NHN 등의 초기 성장 기반을 형성했다. 이 대담한 전환은 21세기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끌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힘이 되었다.
그는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도 “앞으로는 가정마다 단말기를 두고, 궁금한 걸 물어보면 본부에서 곧바로 대답해주는 시대가 온다.”고 설파할 정도로 이 문제에 심취했다.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해 말했고 동시에 정보화 사회라는 미래를 확신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선각자 정치인이었다.
대담한 문화개방 정책을 펴다
또한 김대중은 문화의 개방을 통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데에 집중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일본영화 수입을 허용했다. 일본에 대한 반감을 지닌 많은 시민의 거센 저항도 있었지만 김대중은 문화가 세계와 교류하고 경쟁하면서 힘을 키우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대신 문화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정책과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부분 또한 김대중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무작정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경쟁할 수 있는 체질로 개선하고 키워주는 정책에 소홀하지 않았다. 이게 쉬운 결정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정치인으로서의 대통령이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테제는 경제활성화와 발전을 통한 민생의 개선과 민주주의의 발전이었다. 당장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티나게 도드라진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어설프면 거센 비판과 저항을 자초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부에서는 문화 영역은 적당히 그리고 보기에 좋은 방식으로 대해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달랐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그리고 문화계에 대한 불필요한 규제들을 과감하게 철폐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문화의 경쟁력이 차근차근 커갔고 세계와 호흡할 수 있는 안목과 시야가 확보되었다. 보수 정권의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산하 기관과 단체에 온갖 간섭과 갑질을 마다하지 않았고 심지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거나 그럴 기미가 보이는 문화예술인들을 감시하고 불이익을 가했던 걸 보면 당시 김대중 정부의 그런 태도가 얼마나 대담하고 혁신적이었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제는 특별히 짚어봐야 할 의미가 있다.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하고 다양한 프로젝트에 관여하게 되면 자신들의 성과를 과시하고 싶어서 빠른 결실을 채근하기 쉽다. 그러면 채 익기도 전에 따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게 된다. 관이 개입하면 자신들의 권위를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결실이 나타나면 예외 없이 공치사를 하려 든다. 예산을 받으면서 그런 압력을 외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비자의 반응이 민감하게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정부가 주도하고 간섭하면 이른바 ‘관제 국뽕’의 인위적 느낌을 풍기게 되는데 그걸 느끼는 순간 시민 소비자는 외면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엄청나 물량을 쏟아부어도 한류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건 바로 그런 개입과 과시가 노골적으로, 의도적으로 드러난 걸 느끼기 때문에 소비자가 외면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한류의 성공을 분석하면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기조가 큰 역할을 했다며 2025년 한 프랑스 TV에서 유명한 문화평론가가 그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는 걸 보고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막상 그런 기조를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에서 지금 대한민국의 문화적 융성은 정치인 김대중에게 큰 빚을 졌다.
문화라는 건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경제적으로 결실을 맺는 건 더더욱 어렵고 오래 걸린다. 나라 살림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문화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엄청난 독서를 통해 문화의 가치와 역할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대통령이었기에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돈은 쏟아붓는데 결과는 없으며 문은 활짝 열어놓아 외국의 강력한 문화 자산이 쳐들어오는 위기감을 굳이 선택할 수 있을까? 확고한 신념과 그것을 떠받칠 풍부한 지식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하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문체부가 가장 많은 일을 했고, 어려운 것도 많이 감당했으며, 그만큼 보람 있고 미래의제에 탁월한 선택과 접근을 했던 건 이 시기가 최고였을 것이다. 문체부 공무원들도 힘들었지만 신나게 일했던 때였다고 회고하는 걸 많이 들었다.
만약 당시 김대중의 그 탁월한 판단과 과감한 선택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한류가 가능했을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시에 과도한 디지털 전환과 닷컴버블은 제조업 기반을 붕괴시키고 청년들에게 일확천금의 망상만 퍼뜨릴 것이라며 비판한 언론인과 학자, 그리고 정치인이 많았다. 물론 그런 걱정이 전혀 근거 없는 건 아니었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다며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디지털 전환이 제조업 기반을 무너뜨린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고 IT(Information Technology) 산업의 융성을 이끌며 경쟁력은 더 강화되었다. 만약 그때 과감하게 전환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디지털 강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의 위상이 가능했을까? 그랬다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한류의 세계적 열풍이 가능했을까?
냉정하게 말해서 한류 열풍의 기폭제는 전 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시시각각으로 접속할 수 있게 된 시스템이었다. 사이의 ‘강남스타일’ 열풍의 시작점은 SNS였다. 젊은이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유튜브를 통해 그의 퍼포먼스를 보았고, 전 세계의 많은 유저들은 그의 경쾌하고 명랑한 노래와 율동을 가볍게 즐겼으며 마침내 조회수가 1억이 넘게 되자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마카레나’가 1992년 발매 이후 스페인에서만 인기를 끌다가 1995년 베이사이드 보이즈에 의해 리믹스되고 영어로 번안된 후 1996년 전 세계의 빅히트곡이 된 것과 매우 닮았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당시만 해도 글로벌 네트워크라고 해봐야 접시안테나로 송출하는 위성방송(유료)이 거의 전부였는데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시즌에 미국 여자 국가대표 체조팀이 이것을 따라 하면서 전 세계로 중계된 덕을 크게 봤다. 올림픽 때 주로 신나는 음악이 소비되는 양상과 맞물려 효과는 배가되었다. 그런 양상에 유튜브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강남스타일’의 소비를 폭증시켰다. 만약 김대중 정부 때 초고속인터넷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그렇게 발 빠르게 새로운 매체를 통해 세계와 소통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 선구적 투자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뜨겁고 빠르게 소통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미디어에서 빛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도 그런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러니 한류의 등장과 새로운 평가에 힘입은 열풍은 그런 토양에서 길러진 셈이다.
지도자의 비전과 판단력은 그만큼 중요하다. 한 나라의 미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정권에서 엉뚱하게 퇴행적인 이른바 블랙리스트가 공공연하게 작동되었던 것을 기억하면 그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문화예술계조차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조종하고 통제하려 했으며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어 재정을 과도하게 몰아주면서 자신들의 정권 나팔수와 경비견으로 썼다. 심지어 그들은 아예 영화계와 출판계가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며 통째로 블랙리스트로 간주하며 예산을 아예 없애거나 삭감하는 등으로 온갖 비겁한 짓을 자행했다. 그러면서 단편적인 사례를 부풀려 마치 자신들이 있어서 그 성공이 가능한 것처럼 떠들어댔다. 보수를 참칭하면서 수구와 극우에 기댄 정치인과 지지자들이 어떻게 나라의 미래 가치와 가능성을 망가뜨리는지 우리는 생생하게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태도를 버리지 못하며 엉뚱하게 발목이나 잡는 행태를 보는 건 역겨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확히 구별해야 하는 건 비록 지도자가 수구적이고 심지어 비정상적 과정으로 권력을 차지한 극단적인 경우조차 똑똑하고 미래의제를 명확히 포착하며 전력을 기울일 수 있는 중요한 참모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건강한 보수적 참모와 고위관료가 있었고 지금의 정보통신혁명의 토대를 마련한 케이스가 있었다. 바로 TDX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기술과 정책의 협주가 빚어낸 변곡점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정에서 전화를 가설하는 건 쉽지 않았다. 신청 후 몇 년이 걸리는 건 예사였다. 전국의 전화 가입 대기자가 100만 명을 넘을 정도였다. 핵심은 교환기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고가의 외국산 장비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두 가지 문제에 동시에 직면했다. 안정적인 국가통신망 구축과 기술 및 데이터 자립성이었다. 결국 정부는 우리가 전전자교환기를 개발하기로 했다. 문제는 막대한 예산 투입과 기술 축저이었다. 둘 다 쉽지 않았다. 당시 체신부장관 오명은 청와대에 직접 이 문제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막대한 예산을 약속받은 뒤 정보산업 육성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전자식 교환기 국산화에 사활을 걸었다. 그게 바로 TDX(Total Digital eXchange, 전전자식 디지털 교환기) 개발 사업이었다. 개발 주체로는 한국전기통신공사(KTA, 현 KT)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ERTI, 현 ETRI)가 선정되었고, 삼성전자, 금성사(현 LG전자), 현대전자, 대우전자 등 주요 민간 기업들도 개발 협력에 참여하였다. 이 사업은 정부, 공기업, 연구소, 민간기업, 학계가 유기적으로 합력하여 거둔 성과였다. 한국전기통신공사는 운용 실무와 현장 테스트를 주도했고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기술 개발에 힘썼으며 민간기업은 시제품을 제작하고 양산하는 역할을, 대학은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연구에 협력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중소기업들은 TDX 부품의 국산화 참여로 산업 생태계를 확대시켰다. 이러한 협업 체계는 TDX 개발을 단순한 기술 개발이 아닌, 국가적 기술 독립 프로젝트로 승화시켰다. 동시에 이 협업 체계를 통해 형성된 발전은 향후 각 분야에서 기술적으로 획기적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1981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전자교환기뿐 아니라 여러 시스템을 활착시켰고 1998년 HANBit ATM (Asynchronous Transfer Mode) 교환기를 끝으로 연구개발이 종료되었다.
외국 기술과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실정에 맞는 독자적 교환기를 개발함으로써 기술 자립을 넘어 엄청난 기술의 축적 및 향후 개발의 저력과 발판을 마련했다. 이 경험은 이후 이동통신사업과 디지털 전환에까지 이어짐으로써 지금의 발전이 기초가 되었다. TDX 프로젝트는 단순한 장비 개발에 머물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 정보통신 기술의 근대화와 자립화를 이끈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고 대한민국은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기술 종속에서 기술 주도국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과 대전환점을 마련했다. 이것은 지도자가 똑똑하지 않더라도 관료와 기관이 투철한 애국심과 헌신 그리고 미래의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면 된다는 실증적 사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가 아무런 근거나 대책도 없이 무작정 과학 R&D 예산을 대거 삭감함으로써 미래의제와 가치까지 망가뜨린 건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재앙을 낳았다. 그 패악은 결코 잊어서도 용서해서도 안 될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아무리 미래의제를 정확히 포착하고 구체적인 정책 로드맵을 제시하며 지원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이전의 토대가 없다면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에 대한 기억과 존중은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김대중의 과감한 국가정보화기본계획의 수립과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과 자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런 경험과 그것에 대한 인식이 문화에 대한 과감한 선택과 지원으로 이어졌다는 점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시대정신을 읽고 미래의제를 이끌어낸 정치지도자
정치인 김대중이 정보통신혁명이라는 미래의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은 그가 엄청난 독서량을 통해 배양한 식견과 통찰력 덕분이며 문화에 대한 너른 안목을 가진 것 또한 그가 겪어온 정치적 탄압과 고통을 통해 오히려 관용과 화합을 문화적으로 녹여낸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시스템과 같은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우리의 콘텐츠 파워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빠르게 성장했는지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면 그 시점에서 우리가 정치인 김대중을 소유했던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를 빨갱이 운운하는 멍청한 자들이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 에너지를 김대중처럼 미래의제를 찾아내고 힘을 기울이는 데에 쓰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치인 김대중을 여전히 존경하는 이들도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그의 확고한 정치관을 강조하고 칭송하지 그가 대통령으로서 어떤 식견과 미래의제 설정에 탁월했는지, 그의 문화적 식견이 어떻게 시대를 앞서갔는지 등에 대해 조명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만약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이 그런 인식과 판단을 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디지털 인프라 투자를 전혀 하지 못했더라면, 과감하게 문화의 닫힌 문을 열지 않았다면, 지금의 디지털 대한민국과 거기에서 발아하고 발전한 K-콘텐츠를 비롯한 K-컬쳐의 세계적 중흥이 가능했을까? 아마도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그 시점에 그런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가졌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치인 김대중을 재평가해야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에 대해 많은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문화적 안목과 식견, 그리고 미래의제에 대한 판단과 결단의 힘은 어디에서 올까. 그가 살아온 삶의 층층에서 체득하는 것이겠지만 가장 큰 것은 두루 보고 읽으며 사유하는 힘에서 길러진다. 책 읽는 리더(reader)가 나라와 조직을 이끄는, 제대로 된 리더(leader)가 된다. 책은 평생 멀리하고(달랑 프리드먼의 책 하나 읽었고, 심지어 여름휴가 때 읽는 척이라도 하면서 발표하던 ‘대통령의 휴가 독서목록’ 따위조차 아예 내지 않았던 위인은 결국 내란을 획책했고 그 죗값을 치르고 있다) 거의 날마다 폭탄주나 달고 사는 사람이 리더일 수는 없다. 우리는 그런 반면교사를 경험했다. 엄청난 매몰비용과 기회비용을 치르고.
지금의 한류와 K-콘텐츠의 세계적인 활약과 열풍은 앞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시들해질 수도, 더 흥할 수도 있다. 그럴수록 의제를 파악하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유권자의 안목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 판단이 우리의 미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건 진영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새삼 정치인 대통령 김대중이 고맙고 그립다. 이재명 정부의 문화정책이 김대중 정부를 능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훗날 이재명을 기억할 때 그것을 고마워하고 그리워할 수 있으면 좋겠다.

평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