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포럼

삭개오는 어떤 나무에 올랐을까?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를 '뽕나무'라고 부릅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들었고, 성경에도 그렇게 적혀 있죠!

ree610 2026. 2. 19. 09:29

삭개오는 어떤 나무에 올랐을까?

우리는 흔히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를 '뽕나무'라고 부릅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들었고, 성경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식물학적으로 따지자면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와 우리가 아는 오디가 열리는 뽕나무는 엄연히 다른 종입니다.

정확한 정체부터 밝히자면,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의 학명은 피쿠스 시코모루스 (Ficus sycomorus)입니다. 이를 우리말로 가장 정확하게 옮기면 '돌무화과나무' 혹은 '이집트 무화과나무'가 됩니다.

이 나무의 헬라어 이름인 쉬코모레아(συκομορέα)에 그 특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무화과를 뜻하는 쉬콘(σῦκον)과 뽕나무를 뜻하는 모론(μόρον)이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즉, 잎사귀는 뽕나무처럼 넓퍼짐하게 생겼는데, 열매는 무화과 비슷한 것이 열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한국의 초기 성경 번역자들은 이 단어를 번역할 때 적잖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당시 조선에는 '돌무화과나무'가 서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잎사귀 모양이 비슷하고 한국인에게 친숙한 '뽕나무'라는 단어를 차용했습니다. 이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문화적 의역(dynamic equivalence)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독자들이 삭개오가 누에를 치는 나무에 올라간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뽕나무와 성경의 돌무화과나무는 결정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첫째, 열매가 맺히는 위치가 다릅니다. 한국의 뽕나무는 가지 끝이나 잎 겨드랑이(엽액, 葉腋)에 오디가 열립니다. 반면 돌무화과나무는 굵은 줄기나 가지에 직접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서 열립니다. 줄기에서 바로 열매 자루가 나오는 이 독특한 모습은 뽕나무와 구별되는 가장 확실한 특징입니다.

둘째, 나무의 크기와 수형입니다. 한국의 뽕나무는 낙엽교목으로 비교적 높이가 낮고 가지가 가늘어 성인 남성이 기어오르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무화과나무는 상록교목으로 줄기가 매우 굵고, 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지며 자랍니다. 높이도 10-15미터 이상 거대하게 자라며, 낮은 위치에서부터 굵은 가지가 뻗어 나와 있어 키가 작은 사람도 밟고 올라가기에 아주 적합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 "성경에서 동일한 나무를 어디서는 뽕나무, 어디서는 돌무화과나무라고 했는가?"에 대한 답을 정리해 봅니다.

구약 성경 암 7:14이나 왕상 10:27에 등장하는 나무는 히브리어로 쉬크마(שקמה)라고 합니다. 이것은 삭개오가 올라갔던 돌무화과나무와 동일한 나무입니다. 과거 개역한글 성경은 이를 '뽕나무'로 번역했으나, 최근 개역개정 성경은 식물학적 사실을 반영하여 '돌무화과나무'로 수정했습니다.

신약의 경우, 눅 19:4에서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는 앞서 설명한 쉬코모레아(συκομορέα), 즉 돌무화과나무입니다. 그러나 눅 17:6에서 예수님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실 때 언급된 나무는 헬라어로 쉬카미노스(συκάμινος)입니다. 식물학자들은 이를 흑뽕나무(Morus nigra)로 봅니다. 즉, 눅 17:6의 나무는 실제 뽕나무가 맞습니다.

한국 성경, 특히 과거 번역은 '돌무화과나무'와 '진짜 뽕나무'를 구분 없이 모두 '뽕나무'로 통칭했습니다. 아마도 '쉬코모레아'라는 단어 속에 뽕나무를 뜻하는 어근이 포함되어 있어, 번역 과정에서 두 나무를 동일시하는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식물학적 엄밀함이 아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 이야기의 본질은 그가 어떤 학명의 나무에 올라갔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돌무화과나무는 당시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로수였고, 열매는 맛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던 것이었습니다. 귀하고 높게 뻗은 백향목이 아니라, 먼지를 뒤집어쓰고 길가에 서 있는 흔하고 투박한 나무였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그 흔한 나무 아래에 내려놓고 위로 기어올라갔습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식물학적 논쟁의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절박함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낮은 장소였던 셈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주목해야 할 것은 나무의 종류가 아니라, 예수를 보기 위해 체면을 버리고 길가 가로수에 매달린 한 사람의 간절함일 것입니다. - 김한원 목사

* 예전에 삭개오로 출현하신 분에게 나무 설명도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