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각의 제국”: 기억을 지우는 정치학
* 말씀: 출애굽기 1장 8절
제국은 칼로만 지배하지 않는다. 먼저 기억을 지배한다. 기억을 이어가는 공동체는 감사로 서고, 기억을 끊는 공동체는 두려움으로 무너진다. 출애굽기 1장 8절은 그 전환을 간명하게 알린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다. 의도된 망각이며 계산된 무시다. 구원 서사를 잊게 만들면 사람은 숫자가 된다. 숫자가 되면 쉽게 노예가 된다. 그리고 노예 위에 폭군의 정치학이 자란다. 과거를 지움으로 현재와 미래를 장악한다. 출애굽은 그래서 망각의 밤에서 시작된다.
1. 기억을 지우는 권력
요셉의 이야기는 개인 성공담이 아니다. 위기 속에서 타자를 살린 기억이며, 한 나라를 보존한 은혜의 흔적이다. 히브리어 ‘알지 못하다’(lo-yada)는 단순한 인지적 무지를 뜻하지 않는다. 관계적 앎, 언약적인 연대가 깨어졌음을 암시한다. 애굽의 새 왕은 그 기억을 계승하지 않는다. 감사는 책임을 부르고 책임은 권력을 묶는다. 그래서 권력은 기억을 싫어한다. 망각은 중립이 아니라, 재구성이다. 기억의 빈자리에 공포의 서사를 심는다.
“저들은 위험하다. 너무 많다. 언젠가 우리와 싸울 것이다.”(출 1:9-10)
공포를 조성하는 것은 가장 값싼 정치 권력의 특징이다. 그리고 공포는 노예를 양산하며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2. 사람을 숫자로 만들기: 정체성의 해체
폭군의 정치는 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많아지면 어떻게 하지?” 존재가 ‘이웃’에서 ‘위협’으로 바뀌는 순간 윤리는 붕괴한다. 이어지는 것은 통제의 제도화다. 혹독한 노동이 일상이 된다. 큰 폭력보다 작은 폭력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피로는 꿈을 꺼뜨린다. 꿈을 잃어버리면 저항이 꺼진다. 노예는 채찍 때문에만 노예가 아니다. “다르게 살 수 있다”는 상상력이 꺼져서 노예가 된다. 억압받는 자의식으로 추락한다. 폭군은 또 분열을 심는다.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공동체의 기억을 끊어 생존에만 몰두하게 한다. 자기 정체성이 축소될 때, 노예화는 완성된다.
3. 출애굽의 서곡
그러나 출애굽기 1장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절망은 출애굽의 서곡이다. 제국이 잊을 때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 제국이 축소하려 할수록 하나님은 번성하게 하신다(출 1:12). 제국이 죽이라고 명령할 때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출 1:17) 아이들을 살린다.
큰 무대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큰 구호가 아니라 조용한 불복종에서 반전이 시작된다. 출애굽은 단순한 민족 이동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회복이다. 노예에서 언약 백성으로의 전환이다. 그리고 이 서곡은 복음을 예고한다.
세상은 사람을 숫자로 만들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신다. 세상은 살리기 위해 죽이라 말하지만, 예수님은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다(막 10:45). 십자가는 제국의 방식에 대한 거룩한 불복종이다. 부활은 “폭군의 언어가 마지막이 아니다”라는 선언이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우리의 기억도 바로 은혜 위에 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산 자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 조차도 복음의 기억이 흐려질 때 비슷한 길로 타락한다. 은혜는 성과로 바뀌고, 감사는 경쟁으로 바뀌며, 구원은 자격시험이 된다. 그 순간 우리는 제국의 언어를 따라 말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위기에 처한 오늘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요셉의 기억’은 무엇일까?
** 기도문
기억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은혜의 기억을 잊고 살았습니다.
두려움의 언어로 세상을 읽어온 죄를 고백합니다.
복음의 기억을 흐리게 하여 사람을 숫자로 판단했던 순간들을 용서하소서.
우리 안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기준이 되게 하소서.
제국의 폭력을 십자가로 거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다시 ‘기억의 복음’ 위에 서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