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 절망이 평안으로 -
* 말씀: 창세기 46장 30절
사람은 상실 앞에서도, 평안 앞에서도 종종 죽음을 말한다. 죽음의 언어는 언제나 같은 뜻이 아니다. 어떤 "죽고 싶다"는 말은 삶을 포기하는 절망의 신호다. 그러나 어떤 "죽어도 좋다"는 말은, 삶이 마침내 제 자리를 찾았다는 평안의 고백이다. 창세기 46장 30절에서 야곱이 쏟아낸 한 문장은, 오랜 비극의 서사를 단숨에 접어 ‘안식의 문장’으로 바꾼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창 46:30)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이미 죽은 줄 알았다. 시간은 잔인하게 흘렀고, 야곱의 마음 한켠에는 늘 그 사건이 걸려 있었다. 하나님은 요셉의 얼굴을 통해 야곱의 세계를 다시 쓰신다. 이제 야곱의 고백은 절망의 종착역이 아니라, 평안의 도착역이다.
1. 절망의 죽음 언어가 평안의 죽음 언어로 바뀌다
야곱은 이전에도 죽음을 말한 적이 있다. 요셉을 잃었다고 믿었을 때, 그는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겠다"(창 37:35)는 말로 자신의 애통함을 토해냈다. 그때 죽음은 "더는 못 견디겠다"는 비명에 가까웠다. 상실의 고통이 삶의 모든 의미를 잠식할 때, 인간은 죽음을 탈출구처럼 말한다.
그러나 창세기 46장 30절에서 야곱이 말하는 죽음은 다르다. 같은 단어, 같은 입술에서 나왔지만 전혀 다른 영적 온도를 가진다. 이제 죽음은 도피가 아니라 내려놓음이다. 패배가 아니라 완성이다. 절망은 "모든 게 무너졌다"고 말하지만, 평안은 "하나님이 나를 붙드신다"고 고백한다.
2. 섭리의 결말은 설명이 아니라 만남이다
야곱이 말한 "네 얼굴을 보았으니"는 단지 시각적 확인이 아니다. 성경에서 얼굴은 관계의 언어다. 얼굴을 본다는 것은 다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관계 회복의 언어다. 야곱에게 아들 요셉의 얼굴을 보는 일은 한 인간의 세계가 다시 열리는 사건이다. 하나님은 정보를 넘어, 존재를 회복시키신다. 야곱은 그 회복의 한복판에서, 마침내 "이제 죽어도 좋다"라고 말할 만큼 평안해진다(새번역: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3. "보니 너무 좋구나!"
야곱의 고백은 훗날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안고 노래한 시므온의 찬양을 떠올리게 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29-30)
야곱에게는 요셉의 얼굴이, 시므온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마침내 보게 된 구원이었다. 물론 요셉은 구원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지나 많은 생명을 살리는 통로가 된다. 그 이야기가 한 단계 더 깊어지면, 십자가를 지나 인류의 생명을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야곱의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는 고백은 결국 "그리스도를 보았으니 평안하다"는 믿음으로 귀결된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여기에는 복음의 역설이 있다. 세상은 상실을 결말로 만들지만, 하나님은 상실을 통과해 만남을 결말로 만드신다. 죄가 만든 찢김은 깊고 아프지만, 은혜가 꿰매는 치유의 손길은 더 깊고 따뜻하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만든 최악의 폭력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구원의 마지막 문장을 쓰셨다. 우리가 끝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다시 쓰임받는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다.
** 기도문
마지막을 붙드시는 하나님,
절망이 우리 입술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토해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야곱의 고백처럼,
평안의 자리로 우리를 옮겨 주소서.
”죽고 싶다“는 탄식에서 ”죽어도 좋다“는 찬탄으로 승화되게 하소서.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게 하시고,
얼어붙은 마음을 다시 녹여 주소서.
십자가를 지나 부활로 길을 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오늘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절망이 평안으로 바뀌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