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누구이기에?" - 떨림으로 시작하는 부르심 -
* 말씀: 출애굽기 3장 11절
"내가 누구이기에?"(Who am I?)
모세의 두렵고 떨림은 소명의 시작이었다. 40년의 광야 생활로 다듬어진 것은 그의 실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정직함이었다. 모세는 이미 한 번 실패했다. 정의감에 불타 히브리 형제를 돕다가 살인자가 되었다(출 2:11-15). 그 후 40년을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았다.
그의 정체성에는 두 겹의 상처가 얽혀 있다. “나는 능력이 없다”는 무력감, “나는 자격이 없다”는 죄책감이다. 그래서 모세의 질문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가 아니라 "내가 누구입니까?"다. 소명은 과업이 아니라 존재를 흔드는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1. 떨림이 질문이 될 때
"내가 누구이기에?"는 자기 신화와 자랑을 내려놓는 물음이다. 모세는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자랐지만(출 2:10) 동시에 히브리 노예의 아들이었다(출 2:6-9).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경계인의 외로움이 그의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경계에 선 사람을 부르신다. 경계인은 두 세계를 알고, 두 세계의 고통을 이해한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거룩함, 곧 "두렵게 하면서도 끌어당기는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R. 오토)를 경험한다. 하나님은 모세의 두려움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두려움의 방향을 바꾸신다. 두려움이 '나'를 향하면 무너지나, 그 두려움이 '하나님'을 향하면 진정한 경외가 된다.
2. 소명의 근거는 하나님의 동행
하나님의 대답은 짧고 결정적이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하나님은 모세의 이력서를 고쳐 주지 않는다. 그 대신 소명의 논리를 바꾸신다. 소명의 근거는 소명자의 자격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의 임재다.
우리는 소명과 사명을 생각하면 능력부터 계산한다. 그러나 출애굽기 3장은 '계산의 신앙'을 멈추게 하고 '동행의 신앙'으로 옮겨 세운다. 사명은 자기확장 프로젝트가 아니라,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순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이기에?"는 마침내 "주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로 변환되어야 한다. 그 변환의 자리에서 두려움은 진정한 소명이 된다.
3. 흔들리는 정체성이 예배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현재의 확신 대신 미래의 표징을 주신다.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출 3:12).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미래의 예배가 오늘의 순종을 가능하게 한다. 이후 모세는 묻는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출 3:13) 하나님은 답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역사에 동행하시고 이끄심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라는 선언이다. 모세는 자기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분' 앞에 선 사람이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출애굽기 3장 11절은 우리 시대의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나는 무엇을 가졌는가?"로 바꾸며 산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를 다시 존재의 자리로 되돌린다. "나는 누구 앞에 서 있는가?" 그리고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 약속의 성육신(incarnation)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말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다. 그 임재가 우리를 소명으로 일으키고, 사명으로 걷게 한다. .
**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내가 누구이기에?",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섭니다.
자격과 능력을 계산하느라 주님의 부르심을 미루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하신 약속을 오늘 붙듭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성취가 아니라 주님의 임재 위에 세워 주소서.
이제는 도망치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작은 순종의 한 걸음을 임마누엘이신 주님과 함께 내딛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