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한식 교수님을 추모하며: 이인엽 박사
나의 조지아 대학 박사과정 지도 교수님이자 학문과 사상의 스승이신 박한식 교수님께서, 미국시간으로 어제 1월 20일 저녁 향년 87세로 타계하셨다.
조지아 아틀란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추모식이 기획되고 있는데, 조만간에 일정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제자로서 워낙 많은 은혜와 사랑을 입었기에, 그리운 교수님을 추모하며 곁에서 지켜보았던 교수님의 모습과 해주셨던 말씀들,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글로 정리해 본다.

1. 교수님의 삶과 업적
교수님의 인생은 한국사의 굴곡을 아우른다. 1939년 일제시대 만주로 이주한 부모님 슬하에서 출생해, 어린시절 국공내전의 참상을 경험하셨다. 당시 쌀 한톨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과 전쟁의 혹독함을 겪으셨고, 부족한 음식을 형제들과 나눠먹느라 자기는 키가 많이 못 큰거 같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해방이 되자 평양으로 건너와 피난민 수용소를 거치셨고, 분단 이후 조부의 고향인 경상북도 청도로 내려오셨다.
엄혹한 시절 아버지가 억울하게 빽이 없어서 고초를 겪는걸 보시고, 국회의원이 되려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웅변 연습을 해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하셨다고 한다. 대학시절 4.19 학생운동에 참여하셨는데, 그때 팔에 부상을 입어 좋아하시던 바이올린을 못켜게 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생각이 난다. 무려 196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오셔서 워싱턴 DC의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석사를 하셨는데, 당시 유학생이 거의 없을 때라, 자랑스럽게도 우리 한국학생이 미국에서 석사를 취득했다고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축하 파티를 열어줬다는 말씀도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미네소타 대학에서 박사를 마치시고 조지아 대학에 부임해서 1970년 부터 2015년까지 무려 45년간 국제관계학을 가르치시며 수많은 학생들을 양성하셨다. 북한 연구의 선구자로 주체사상이나 북한 체제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기셨다.
교수님은 학술활동을 넘어 현실외교와 정책 수립에서도 큰 역할을 하신 매우 독특한 분으로, 1981년 초대를 받아 평양을 방문 한 이래, 5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남북미 외교에서도 큰 족적을 남기셨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 남한 출신이지만 미국 시민권자라는 특수한 상황을 통해 남과 북을 둘다 방문할 수 있는 한반도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 활용하셨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피스케이커로 자신의 소명을 인식하시고, 쉬지 않고 연구와 저술, 교육과 외교 등 여러 분야에서 열정적인 활동을 하셨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 한다는 이유로, 남한에서는 소위 '친북 인사'로 음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남한의 독재시기에는 조지아 대학에 다른 한국 유학생들이 와도 교수님께 인사도 없이 피하는 이들이 있어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대사관에서 유학생들에게 교수님이 친북인사니 접촉하지 말라는 교육이 있었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야 이런 행태가 없어졌다고 말씀하셨다. 평화의 다리가 되려는 이는 양쪽에서 밟힐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처럼 오해와 마녀 사냥을 당하면서도 교수님은 굽히지 않고 본인의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사셨다. 사실 80년대 부터 미주 지역의 많은 학자, 종교인, 언론인들이 교수님처럼 북의 초대를 받아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정치적 변화와 상관 없이 교수님 처럼 꾸준하게 남북미를 오가며 외교적 역할을 이어가신 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그렇게 북을 방문하시 시작한 미주 인사들 중에는 소위 '장군님 만세' 같은 어이 없는 발언을 하는 친북인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미국 정부에 어떤 영향력이나 커넥션이 없기에 북한으로서는 효용 가치가 없었던 반면, 교수님은 모든 활동을 미국 국무부와 협의 하에 진행하셨기에 북미를 이어주는 실질적인 채널 역할을 하실 수 있었다고 한다.
한반도 문제를 정치화 하지 않으시고 화해와 평화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셨기에, 남북미의 정치적 변화와 상관없이 오랜시간 북에 대한 채널을 유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북을 방문하시면 남한에 들러 인터뷰를 하셨는데, 오해를 막기위해 본인과 입장이 유사한 진보 언론 보다도 일부러 중도 보수인 중앙일보를 골라 김영희 대기자와 정기적으로 인터뷰를 하셨다는 말씀도 기억에 남는다. 오랫동안 교수님 말씀을 들었지만 북한 지도자나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발언 같은 건 한번도 들은 바가 없다. 다만 남과 북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조국으로 생각하셨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된 한국이 남과 북을 아우르며 양 체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제3의 모델을 인류에 제시하는 꿈을 꾸셨다. 북한은 물론 중국도 닫혀있던 시절, 교수님은 중국을 방문하시면서 남한의 가족과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이들을 연결하는 역할도 하셨는데, 캠코더로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사연을 녹화해 남한의 방송국을 통해 많은 이산가족들을 연결하셨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친구이자 해군 장교였던 분이 교수님의 학생으로 공부했던 것을 계기로 카터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한반도와 동아시아 정책에 대해 자문을 하게 되었는데, 제1차 북핵위기로 클린턴 정부가 북한 폭격 계획을 세우고, 남한의 미국 시민들을 소개 개획까지 세우는 등, 전쟁이 임박했던 1994년, 전임 대통령인 카터의 방북을 물밑에서 주선하셨고, 잘 알려진대로 카터와 김일성의 만남이 제 2의 한국 전쟁을 막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북에 억류된 미국 여기자 석방을 위해 2009년 퇴임한 빌 클린턴이 방북할 때도 교수님이 막후에서 방문을 주선하시기도 했다. 이런 역할로 인해 교수님은 한반도 관련 주요 이슈가 나올 때 마다 CNN과 BBC를 비롯한 유수의 언론들의 인터뷰와 기고를 하셨다. 1995년 부터 조지아대학교에 국제문제 연구소를 설립하고 소장을 역임했으며,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예비 노벨평화상이라 평가받는 간디 킹 이케다 평화상을ㄷ 수상하시기도 했다.
2. 개인적인 기억들
교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감사와 기억들도 너무나 많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석사를 하던 시절, 마침 DC에 계시던 서재정 교수님과 대화 나눌 일이 있었고, 박사 지원을 상의했었는데, 미국의 북한 전문가로 박한식 교수님과 몇분을 추천해 주셨었고, 박교수님이 계신 조지아대학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나와 떨어져서 이대에서 북한학을 공부하고 있던 아내(당시 여자친구는)는, 내가 조지아 대학에 지원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당시 자신의 석사 지도교수님을 비롯, 조지아 대학에서 공부한 분들을 연달아 세명이나 만나게 되었는데 그래서 왠지 그리로 공부하게 될 거라는 느낌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박사지원, 결혼을 위해서 장학금이 절실하던 나는, 전액 장학금과 입학소식을 듣고 뛸듯이 기뻤고, 그 덕에 장기 장거리 연애를 끝내고 결혼후 박사과정을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박교수님이 내 지원서를 보고 장학금 주고 데려오라고 학과장에게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셔서 감사했던 기억이 있다. 결혼하고 박사과정을 시작한 것 부터 교수님의 은혜를 입은 셈이다.
곁에서 본 교수님은 학자, 민간 외교가, 그리고 사상가라는 다양한 면모를 가지셨는데, 평화를 향한 지극히 이상적이고 철학적인 논의를 하시는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외교의 당면 과제를 다루시는 매우 독특하고 신비하게 느껴지는 분이셨다. 전형적인 기독교인은 아니셨지만, 젊은 시절 함석헌 선생, 강원룡 목사 같은 분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으셨고, 피스메이커라는 역할을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그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시는 존경스러운 분이셨다. 한국의 교수님, 미국의 교수님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장단점들이 있는데, 나는 교수님은 양쪽의 장점만을 갖춘 분이라고 느꼈었다. 한국적인 면에서, 정감있고 자애로운 스승으로 돌봐주시는 동시에, 미국 적인 면에서 제자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셨다. 일제 시대 출생하셔서 아버지 보다 더 연배가 높으심에도, 한번도 하대를 하신적이 없이, 황송할 정도로 늘 존대를 해주셨다. 전화를 하거나 음성 녹음을 하시면 "이박사, 나 박교수입니다"라고 하시던 교수님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다.
2년전 먼저 떠나신 교수님의 사모님도 아버지가 의사셨던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 교수님과 뜻과 꿈이 통하는 동반자셨고, 교수님이 여러 활동을 하실때 긴밀히 내조를 하셨다 (헤로니모로 잘 알려진 전후석 감독이 사모님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교수님 부부를 스승이나 어른으로 깊이 존경했었다. 아내는 교수님 부부를 몇번 집에 초대해서 정성껏 음식 대접을 해 드렸는데, 오랫동안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제자가 집에 초대해서 음식대접을 한 것은 처음이라고 좋아하셨던 기억도 난다. 아내가 그때 약식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잣으로 한반도 지도를 만들고, 대추를 잘라서 주요 도시들을 표시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대접하기도 했었다. 아내가 한반도 문제에 대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시고는 사모님과 두분이 크게 읽으면서 좋아하셨다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던 것도 감사한 기억으로 남는다. 학기가 끝날 때면 한인 학생들을 집에 초대해서 식사도 대접해 주시고, 다 같이 교수님 댁에 있는 노래방기계로 노래를 부르며 흥겨운 시간도 가졌는데, 음악을 사랑하시던 교수님은 조용필의 친구여를 즐겨 부르셨다.
2011년에는 남한, 북한, 미국에서 대표단을 초대해 Track II 회의를 개최하셨는데, 개인적으로 그 준비와 진행에서 교수님을 긴밀히 도와드렸던게 큰 보람과 추억으로 남았다. Track II는 정부대 정부의 외교를 넘어 학자, 언론인 등 민간 외교를 통해 대화를 촉진하고 정부 외교를 돕는 취지였는데, 북에서는 당시 남한에도 잘 알려진 리종혁 위원장이 대표단을 데리고 참석했고, 남과 미국에서도 잘 알려진 학자 언론인 분들이 참여해 활발한 대화와 토론을 벌이고 합의문도 작성한 바가 있다. 의외로 미국 측에서는 북한의 입장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게 많다는 반응도 있었고,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 하면서 격렬한 토론을 하다가도, 저녁에 한국 음식을 먹고, 고향의 봄 같은 노래를 부를때면 남북이 금새 어우러지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작고하신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 교수님 부부도 행사내내 참석해서 음악과 대화로 자리를 빛내주셨었다. 2박3일 따듯한 대접을 받고, 헤어질때는 북한 고위 관료들이 어린아이 처럼 눈물을 글썽거리며 아쉬워 했던것도 인상에 남는다. 정권에 충성하는 고위층 인사들이라 약간의 편견이 있었지만, 이들에게도 진실된 민족애가 느껴져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지아 대학 박사과정 시절 깊은 인연을 맺은 곳이 쥬빌리파트너스라는 난민지원 크리스챤 공동체였다. 킹 목사의 시민권 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조지아에서 흑백통합 농촌공동체인 코이노이아를 시작한 클래런스 조던이라는 신앙인이 있었는데,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협박과 테러를 넘어 지속된 공동체 운동에서, 밀라드 풀러가 시작한 집짓기 운동인 해비태트가 태동하였고, 코이노니아에서 파생된 공동체가 쥬빌리였다. 여기 창립자중 한분이 단 모슬리로 60년대 한국의 평화봉사단 책임자로 활동하시기도 했고, 한국을 특별히 사랑하는 분이었다. 이분은 박교수님과 동갑이자 절친이었다. 또한 은퇴한 한국 선교사인 커피 워스 선교사님이 쥬빌리에 계셨는데, 한국 전쟁 직후 한국에 와서 80년대까지 선교 활동을 하시며 계명대 설립에도 큰 역할을 했던 분으로 먼저 돌아가신 남편 조지 워스 선교사님(한국명 오천혜)은 한국에 가족계획을 저음 소개하신 분이시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박한식 교수님은 지미 카터, 밀라드 풀러, 단 모슬리, 커피 선교사님 같은 분들과 친밀한 관계로 여러 활동들을 함께 하고 계셨다는 점. 지금은 조지아가 소위 퍼플 스테이트가 되고 있지만, 당시만해도 매우 전형적인 보수 공화당 강세 지역이었음에도,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이런 분들이 교류하며 활동하고 계셨던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귀한 인연으로 남았다.
박한식 교수님은 내가 박사를 받은 직후인 2015년에 퇴임하셔서 박사로는 내가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교수님께 받은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부족하나마 교수님의 꿈과 사상을 이어가는 제자가 되자고 다짐해 본다.
교수님은 퇴임 후에도 최근까지 강연과 저술을 쉬지 않으셨고, 조지아 대학에 본인의 이름을 딴 석좌교수 자리를 만들어 본인의 평화학 연구를 이어가기를 기대하셨고, 궁극적으로 개성에 평화대학을 만들어 한반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세계 학생들에게 평화를 가르치는 꿈을 꾸셨다. 안타깝게도 석좌교수 자리를 위한 모금이 마무리 되지 못했고, 남북 관계, 북미관계는 부침을 거듭하다 냉각기를 겪고 개성 공단마처 폐쇄된 상황이다. 투병중이시던 사모님이 최근에 먼저 작고하시고, 교수님이 쇠약해 지시는 것을 걱정했는데, 얼굴 뵙고 마지막 인사도 드릴 기회가 없이 교수님이 떠나셨다. 미처 전하지 못했지만, 교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에 너무나 감사드린다는 것, 그리고 교수님은 일제시대와 독재와 분단, 냉전의 엄혹한 시절을 겪으면서도 피스메이커로서의 사명에 자신의 인생을 남김없이 불태우셨으니, 교수님을 너무나 칭찬하실 하나님의 품안에서 이제는 편히 쉬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교수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박한식 교수님의 삶과 연구, 사상이 궁금하신 분들은 시중에 출판된 교수님의 책들을 추천드린다.
- 선을 넘어 생각한다 (2018)
- 평화에 미치다 (2021)
- 안보에서 평화로 (2023)

[故 박한식 교수님을 추모하며]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연구에 평생을 헌신해오신 박한식 조지아대 교수님께서 지난 20일 별세하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깊은 애도와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박한식 교수님께서는 하얼빈에서 태어나 평양과 대구에서 한국전쟁의 참상을 겪었습니다. “통일될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는 부친의 말을 품고 미국으로 떠나 한반도 평화 연구와 남북관계 개선에 평생을 바쳐왔습니다. 남북 간 냉전과 적대의 언어를 넘어 대화와 이해, 공존의 가능성을 일관되게 제시해 왔습니다. 한반도 문제를 힘의 논리가 아닌 사람과 평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 주신 귀중한 유산은 우리 모두의 길잡이가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님과 더불어 평화의 시대를 설계했던 고인의 발자취는 한반도의 명운을 바꾼 담대한 지적(知的) 등불로 빛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저희가 받아안아 이어가겠습니다. 고인의 뜻을 기억하고 평화의 길로 정진하겠습니다.
학자의 곧은 신념으로, 실천가의 치열한 헌신으로 살아오신 故 박한식 교수님의 평안을 빕니다. - 정동영 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