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정종훈 교수님의 정년은퇴를 축하하며, 기독교윤리학의 과제에 대해 생각한다 1. 연세대학교 교수/교목으로 30년을

ree610 2025. 6. 25. 09:15

정종훈 교수님의 정년은퇴를 축하하며, 기독교윤리학의 과제에 대해 생각한다. - 박충구 명예교수

1.
지난 토요일 연세대학교 교수/교목으로 근 30년 사역하고 은퇴하는 정종훈 교수님 은퇴감사예배에 참석하여 축하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교수님은 나와 같은 분야인 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소명을 받으신 분입니다.  

축사(祝辭)

이 자리에서 축하드릴 이유가 무수히 많을 것이지만 저는 각별한 이유 세 가지만 말씀 드리려 합니다.

첫째, 윤리학자로서 소명 잘 감당하시고 정년은퇴하시는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정교수님과 같은 분야인 기독교윤리학 교수로서 정 교수님께서 관동대학에 계실 때부터  같은 학회에서 학문 활동을 해왔고, 또한 최근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지식인 종교인 네트워크에서도 함께 활동해온 사람으로서 정교수님의 윤리학자로서의 학문적 관심과 성실성을 오래 지켜본 사람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에게는 신학의 다른 분야와는 달리 부단히 교회와 현실사회를 개혁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가도록 이끄는 소명이 있습니다. 윤리학자라 하여 이 길을 모두 잘 가는 것은 아니지요. 불교적 용어를 빌어 말한다면 탐진치(貪瞋癡)에 빠지면 그 소명을 다하지 못하게 됩니다. 정교수님께서 연세대 재임기간 기독교 윤리학자로서 그 소명을 성실하게 잘 감당하시다가 정년 은퇴하시게 되었으니 진심으로 축하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한국 사회와 교회를 위해 예언자적 소명을 잘 감당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정교수님의 학문적이며 목회적인 관심을 살펴보면 특별한 주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통일문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인권문제, 그리고 교회 개혁문제 등이 늘 교수님의 학문적 관심사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런 관심은 우리사회나 교회에서 금기사항에 속합니다. 이런 주제들에 대해 글을 쓰거나 말을 하면 교권주의자나 보수적인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한국 교회에서 평화, 통일, 정의, 인권 문제 등을 언급하면, 그는  쉽게 진보좌파로 분류되거나 수구 보수적인 분들로부터 빨갱이 소리까지 듣는 것이 현실입니다. 많은 윤리학자들이 있지만 모두 다 예언자적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교수님은 우리 시대의 예언자로서 그 사명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려면 특히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믿음과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정교수님의 글이나 행동을 보면서 저는 이 분에게는 분명한 확신과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 교수님께서 믿음으로, 이 시대의 예언자적 소명을 잘 감당해 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셋째, 자유인이 되시는 것을 축하드립니다.

대학에서의 정년 은퇴는 개인적으로는 공식적인 대학 내 모든 지위와 책무에서 놓여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대신 얻는 것이 있지요. 자유입니다. 이제 정교수님께서 연세대학교에서 벗어나, 더 큰 자유를 얻으실 것이니 은퇴 후에도 자유인으로서 더 귀한 일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 교수님께서 자유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
같은 기독교윤리학자로서 은퇴하시는 정교수님을 생각하며  쓴 축사입니다.  기독교윤리학은 과거엔 조직신학의 마지막 파트로도 충분했지만, 1950년대를 지나면서 급변하는 세계현실에 직면하여 과거의 신학적 사고를 넘어 사회 변화 현실과 대화하고, 그 변화의 흐름에 응답하면서도 기독교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을 지키고 사회 관련성을 해명할 필요에 의해 생겨난 비교적 다른 분야에 비해 새로운 신학 분야입니다.  

과거의 신학 분야의 불충분성때문에 생겨난 신학 분야지요. 따라서 기독교윤리학은  현대사회와의 관련성을 잃고 게토화되는 교회현실을 극복하기위해 교회와 사회를 매개하는 학문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이론과 신학과의 대화없이는 수행하기 어려운 학문분야입니다. 제가 공부하던 독일 본(Bonn)대학에서는 1980년대부터 기독교사회윤리학 분야를 위한 도서만 모아놓은 작은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같은 관심을 가지는 학문 분과지만, 미국에서는 기독교윤리학(Christian ethics)이라 부르는데 비하여,  독일의 학문적 흐름에서는 기독교사회윤리학(evangelische  Sozialethik)이라고 불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오랜 동안 기독교인들은 복잡다단한 현대 세계에서  과거에 형성된 신학적 이해 구조에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자기 한계와 곤경을 겪었습니다. 예컨대 왕정체제에서 셋팅된 권위주의적 정치윤리는 왕이나 귀족의 특권을 폐기한 민주주의 사회에선 유통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런 곤경을 극복하기 위해 설치된 신학 분야가 기독교사회윤리학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야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문제들 - 환경문제, 정치윤리, 핵문제, 전쟁, 인공수정, 인공유산, 생명복제, 줄기세포연구, 유전공학, 성차별, 동성애, 현대 인권문제, 사이버스페이스 문제, 인공지능 등등 과거의 신학이 전혀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사회 문제들을 신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과제를 수행해 왔습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가 편만한 세상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3.
한국교회 일부는 교회성장에 취해서 독일이나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기독교사회윤리학의 학문적 소산들을  "진보", "좌파"들의  주장이라고 매도하고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결국 반지성주의에 빠지는 게토종교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한국 교회 신자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들은 여전히 자기 만족에 취해있고, 소형교회들은 사회적 관련성을 상실한 독백에 빠지는 경우가 매우 흔합니다. 최근에는 대형 교회 목사들이 대를 이어가며 교회를 사유화하고,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마저 상실한 채 하나님의 교회를 정치 도구로 삼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보수적인 신자들은 진리가 이미 다 밝혀졌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새로운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같은 부류가 모이는 자리에서 자신이 품고 있는 진리를 습관적으로 확인하곤 합니다. 동시에 세상에서 벌어지는 문제들과의 신앙 관련성을 잃습니다. 관련성을 잃게되니 사회적 책임 문제는 생각도 하지 않는 정신적 폐색증에 걸립니다.

4.
이런 이들이 모여있는 교회는 사회적 관련성을 상실한 보수적인 신앙을 자랑하며 그런 신앙을 순교적으로 지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거의 광신에 가까운 사유방식이지요. 광신은 이성적 사유를 포기하는 편견을 낳고,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대화능력을 상실합니다. 다양한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어서 이런 분들은 자꾸 같은 동류들을 찾습니다.  사회에서 깊은 소외를 겪으며 그 소외감을 신앙인이 담담히 겪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관련성 상실과 무책임을 그렇게 감상적으로 퉁칩니다.

기독교윤리학은 이런 흐름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교회와 신자들이 자신들이 속해있는 세상, 사회에 대하여 복음의 정신을 따라 책임적 실천 지평을 찾도록 안내하는 신학의 한 분야입니다. 이런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기독교윤리학자에게 자꾸 묻습니다. “왜 허구한날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혜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자꾸 찔러대는 이야기만 골라서 하느냐고.”

이는 마치 외과 의사에게  “건강하고 멋지다고 칭찬하고 격려하지 않고, 왜 메스를 들이대며 수술만 하느냐”고 묻는 것과 유사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외과의사에게 가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병든 사람은 의사에게 가서 진단을 받고,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5.
최근 우리 사회는 빛의 혁명으로 스스로 왕 노릇하던 비민주적인 권위주의자의 통치에서 벗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국민주권 정부로 세팅을 다시 하는 중입니다. 국민주권 정부란 다른 말로 하면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 여기는 민주정권입니다. 전 헌법 재판소 문형배 판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민이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정권이 국민을 섬기는” 민주적 정치를 이르는 표현입니다.  바람직한, 큰 변화입니다.

이제 권위주의적 지배에서 특권을 누리던 이들은 가고, 민주적으로 국민을 섬기는 이들이 오겠지요.  교회에서도 어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도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고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유통되는 권위주의적 지배의식은 독재적 정치 지배자를 옹호하고, 공교회를 사유화하거나, 과거에 형성된 편협한 편견에 사로잡혀 교회의 사회적, 역사적 책임을 망각하게 만드는 질병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