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天) 아래, 땅(地) 위에서, 사람(人)으로 - 정종훈 교수 (연세대학교) 부족한 사람의 정년 은퇴를 축하하기 위해 오신 분께 감사..

하늘(天) 아래, 땅(地) 위에서, 사람(人)으로
- 정종훈 교수 (연세대학교)
부족한 사람의 정년 은퇴를 축하하기 위해 오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대학에서 학생들과 씨름하며 생활한 29년 6개월을 뒤로하고, 공식적으로 정년하는 것이 적지 않게 아쉬우면서 다행인 점 또한 없지 않습니다.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대과 없이 축복 속에서 정년 은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가족과 친구, 동지 여러분의 사랑과 지지 덕분입니다. 정년 은퇴를 기념하면서 무슨 강연을 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교회와 공공성의 과제”를 중심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일반 강연에서 다룰 수 있는 것보다는 저만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정년 은퇴 시점에 걸맞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성찰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저의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니, “하늘 아래, 땅 위에서,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늘 천, 땅 지, 사람 인, 천지인의 삶을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천(天), 제가 신앙하는 하나님 앞에서, 지(地), 신앙의 정체성을 갖고 삶의 모든 현장과 씨름하면서, 인(人), 사람답게 살고자 몸부림친 셈입니다.
1. ‘나’를 ‘나’되게 한 삶의 산실
먼저 저를 저되게 한 삶의 산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저의 신앙을 훈련했던 무학교회 (1972-1982)입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교회 부흥회와 여름 수련회, 겨울수련회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교회 친구들과는 주로 탁구장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참석했던 교회 부흥회에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고전 10:31) 라는 말씀으로 크게 도전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뚜렷한 목표 없던 저를 목회자의 길을 걷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학부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여름농촌봉사대에 참여한 것과 무학야간학교의 교사로 활동한 것입니다. 저는 여름농촌봉사대를 통해서 저곡가정책으로 고통당하는 농민들의 삶의 자리 농촌에서 목회자로 생활할 것을 결심했고, 4년 간의 야간학교를 통해서 저임금정책으로 고통당하는 청소년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우리 사회의 제반 문제들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무학교회에서 만난 교회 친구들과 부부 동반으로 만나고 있고, 야간학교 친구들과도 1년에 한두 번은 만나 서로의 삶을 나누고 있습니다.
둘째는 청춘의 꿈을 꾸며 진리와 자유를 만끽했던 연세대학교(1978-1982) 입니다. 신과대학에서는 종교극회하는 친구들을 도와 ‘예언자 아모스’ 연극에서 백성1로, 디트리히 본회퍼를 다룬 ‘전율의 잔’ 연극에서는 본회퍼의 안위를 염려하는 주교로 출연했습니다. 대동제 학술대회에서는 “일제하 기독인의 자기반성”이라는 주제 아래 순수신앙을 강조하던 기독교인들이 일제 식민지 삶의 현실과 초연하려고 했던 것을 비판했습니다. 교회를 독립운동의 도구로만 보려 했던 일부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신앙의 정체성을 결여했던 것을 비판했습니다. 학술제의 논문 발표를 계기로 연세문화상 학술상에 도전했고, “파울로 프레이리의 프락시스 개념과 그 비판”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안세희 총장님께 학술상을 수상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1, 2학년 시절 인간연구회 써클을 만나 매주 책 읽고 토론하면서 세상을 직시하고, 세계관과 가치관을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만난 동기들과 두 달마다 세미나를 하는데, 이 동기들이 연세대학교에서 받은 최고의 선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신과대학의 선후배들로 구성된 연세신학연구회에서는 매달 만나 시국 상황과 교회 문제를 토론했고, 목사와 신학자인 우리는 사회와 교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때로는 시국성명서나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셋째는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고자 장교로 지원한 군대(1982-1985)입니다. 집과 교회, 그리고 학교라는 삼각 테두리를 벗어난 적이 없던 제가 사병으로 입대하면 군종 사병이 되어 다시 교회 중심으로 생활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학사장교 2기로 지원했는데, 특공대 소대장으로 배치되어서 천리행군, 100km 지속행군, 해양훈련, 공수훈련, 침투훈련 등 엄청나게 고생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특공소대에서는 “우리는 인간이다.”라는 소대훈을 만들어 소대원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고, 그때 만난 친구들 가운데 몇 명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대대 간부회의에서 입바른 소리를 종종 했는데, 그것을 괘씸하게 본 네 명의 중대장이 집단으로 저를 구타했던 것이 기억으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육사 출신 대대장만은 “다른 놈들은 믿을 수 없지만, 정 중위만은 내밀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친구”라고 말하면서 가끔 관사로 불러주었던 것이 큰 격려였습니다.
넷째는 농촌목회자가 되기 위해 진학했던 장신대 신학대학원(1986-1990)입니다. 당시 저는 남서울제일교회 교육전도사로서 중등부에서 2년, 고등부에서 2년 사역했는데, 신학대학원의 공부보다 교육전도사 활동에 비중을 두고 혼신을 다했습니다. 그때 시사토론반, 역사반, 문학반, 과학반, 연극반, 음악반 등 특별활동을 통해서 어린 친구들을 도전하고자 했습니다. 친구들의 학업을 돕고자 서강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한양대에 재학하는 대학부 학생들과 국어, 영어, 수학 등 무료 수업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교회 장로님들은 저를 의식화 전도사로 의심하며, 수시로 저의 설교를 청취하곤 했습니다. 한편, 한국교계에서 걸출하게 활동하시던 홍성현 목사님을 만나서 제3세계신학연구소를 함께 창립했고, 1987년 연구원으로서 “민족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을 ‘제3세계’ 계간지 창간호에 실으면서 한반도 평화통일의 문제에 천착(穿鑿)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신대 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을 전공했는데, 주임교수가 세미나에서 “정 전도사는 북에서 온 사람 같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맑스의 제자로 보인다.”라며 수시로 비난한 것이 계기가 되어 농촌목회자의 꿈을 접고, 학생들을 격려하고 키우는 좋은 교수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마지막 다섯째는 가난한 유학생으로 생활하던 괴팅엔 대학교(1990-1995)입니다. 저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이신 Dietz Lange 교수님은 대학의 부총장으로서 무척이나 바쁘셨지만, 저의 논문 지도에 대해서는 열정을 다하셨습니다. 그 결과 저는 독일인 박사 후보생 여섯 명보다 먼저 박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유학 중에 Knut Wellmann 목사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그분은 난민 신청자들을 돕는 활동을 하셨는데, 저의 독일 생활의 멘토이셨고, 저의 박사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일어답게 수정하는 것을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Wellmann 목사님을 통해서 어떤 목회자가 되어야 할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박사논문을 쓰면서 독일 역사를 공부하는 유학생 모임을 조직했습니다. 독일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독일에서 박사논문을 쓰는 것은 무모하다는 자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때 모임을 함께 꾸렸던 일고여덟 명 유학생은 대부분 교수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독일교회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1945년 이후 독일 개신교 사회윤리와 민주주의”란 제목 아래, “민주주의에 기여한 독일개신교협의회의 문서들”이라는 부제로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지도교수님의 주선으로 독일루터교 총회가 저의 박사논문을 책으로 출판해 준 것은 큰 영예였습니다. 유학생활 중 힘들 때 저를 격려했던 성경 말씀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 126:5-6)라는 시편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제가 할 일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이고, 기쁨의 단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 교육자와 연구자로서 살아온 삶의 자리
다음으로 교육자와 연구자로서 살아온 삶의 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995년 12월 제가 박사학위를 취득한 직후 귀국했을 때, 어느 지방신학교 총장께서 기독교윤리학 전임교수로 채용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사회의 결의는 요식적인 것이니 다음 학기 강의를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월 초가 되었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어서 지인 교수에게 문의하니, “총장님을 찾아뵙고 정중하게 인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정중하게 인사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들렸기에, 기독교윤리학자가 첫 단추를 그렇게 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바로 접었습니다. 나중에 “기독교윤리를 가르치겠다는 사람이 한국윤리를 몰라서 되겠느냐.”는 말이 들려 왔습니다. 하여튼 그 총장의 공수표로 인해서 급하게 시간강사 자리를 찾았고, 다행히 연세대학교, 한남대학교, 장신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할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시간강사 1년(1996) 만에 대학 전임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시간강사 후 두 번째 삶의 자리는 관동대학교 교수(1997-2000)입니다.
저는 신설한 기독교학과 기독교윤리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학과장으로서 학생들을 지도해야 했고, 교목으로서 양양캠퍼스 대학교회 담임목사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일의 양이 엄청났습니다. 학과에 교수가 두 명이었지만, 선배 교수는 이사장의 친동생으로 한 학기에 한 과목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공에 상관없이 신학 전 분야의 대여섯 과목을 강의해야 했습니다. 강의 준비하는 것이 버거웠고, 학생들에게 깊이 있게 가르치지 못해서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윤리학자로서 지역사회에 대한 실천적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NGO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신학위원으로서 강릉지부 활동을 이끌었고, 영동크리스천신문 편집인으로서 지역교회들의 에큐메니칼한 연합을 위해서 매달 8면의 신문을 만들어 무료로 배부했습니다. IMF 시기였기에 ‘실업극복강릉시민연합’의 운영위원이 되어 노숙자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었고, 간단한 식사 제공과 직업 알선을 통해 자립의 길을 가도록 도왔습니다.
관동대학교 교수 후 세 번째 삶의 자리는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수(2000-2025) 입니다. 교목실 교수로 취임했지만, 3년째에 연합신학대학원 소속의 기독교윤리학 교수로서 교목의 보직을 겸직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탈북민 학생들이 주축인 통일한마당 동아리를 창립하고, 지도교수로서 20년 남짓 활동한 것입니다. 저는 탈북민 학생들과 매주 목요일 정기모임을 했고, 학기 초에는 1박 2일 MT를 했으며, 방학 중에는 제주도, 거제도 등지에서 2박 3일의 여행을 했습니다. 모든 비용은 저와 관련이 있는 교회들의 정기 후원금으로 충당했습니다. 저는 학비 없이 공부하는 탈북민 학생들이 생활비 걱정 없이 공부하도록 온갖 장학금을 끌어들였습니다. 매달 1인당 30만 원씩 40명에게 지급하는 대성그룹 장학금만 6억 원 이상을 지원받았습니다. 학사경고를 당해 등록금을 내야 했던 탈북민 학생들을 위해서는 주변 친구들과 십시일반으로 등록금을 마련해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탈북민 학생들과의 경험을 글로 쓴다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연세대학교 전체 평교수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교수평의회에서 11대, 12대 부의장으로 3년을 활동했습니다. 연세대학교에 온 지 3년 만에 부교수 진급 직전의 조교수로서 40대 초반의 나이로 이 일을 맡았습니다. 은퇴하신 선생님께서는 “군대로 말하면 30대에 별을 단 것과 다를 바가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축하해 주셨습니다. 당시 의장과 저는 총장선거와 재단개혁을 위해서 이사장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재단 이사장의 약속을 받지 못하면 교수평의회의 활동이 성과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교수평의회가 총장선거를 주관해서 상위 2명을 이사회에 추천해도 이사회는 언제나 제3의 인물로 선임해왔기 때문입니다. 재단에는 상임이사가 한 분 있었는데, 그는 총장을 비롯한 주요 보직자들의 KingMaker로 주인 없는 연세대학교의 실질적 주인이라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의장과 저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수평의회 추천 후보자 2인 가운데 1인을 총장으로 반드시 선임할 것”과 “상임이사제도를 폐지하고 교수로써 법인본부장을 세워 총장과 이사회의 연결고리를 만들 것”을 제안했고, 결국 관철시켰습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 본교 캠퍼스와 의료원 캠퍼스, 원주 미래캠퍼스 간의 벽을 허물어 협력과 연대를 강화했고, 교수들의 복지와 권리를 증진하는 일에 기여한 것은 큰 보람이었습니다.
본교 교목실장의 보직을 감당할 때는 ‘언더우드학원선교센터’를 만들어 연세대학교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계승, 발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언더우드리더십 과정을 만들어 학생들의 리더십을 도전했고, 연세대학교 명저 출판 교수들 강좌를 개설해서 지역교회 목회자들이 무료로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노터치 영역이었던 일반대학원에 채플과 기독교 공통과목 세미나를 개설해서 기독교적인 가치를 공유할 기회를 제도적으로 구축했습니다. 연세의료원의 원목실장 겸 교목실장 보직 때는 힐링에 무게 중심을 둔 ‘직원수양회’를 개최해서 직원들의 만족도와 자긍심을 고양시켰습니다. ‘연세의료원생명의료윤리포럼’을 통해 의료행위의 기독교적 기준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코로나 초창기 때 마스크 구매가 쉽지 않을 때, 미국의 은퇴한 선교사들에게 보은의 차원에서 마스크 3000만 원어치를 구매하여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연세의료원 보직 당시 연세의료원장께서 돈에 구애받지 말고,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라며 격려해 주어서 즐겁게 올인하며 일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삼애교회에서 2년, 대학교회에서 3년 담임목사직을 수행했습니다. 대학 캠퍼스에 있는 두 교회의 존재 이유를 대학 캠퍼스 선교에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점심을 거르는 학생들을 위해 식권 비용을 지원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내놓았습니다. 기독 동아리들의 MT 장소로 교회 공간을 개방했고, 간식을 제공하며 격려했습니다. 지역에서 장애인 활동하는 학부모들이나 홈스쿨링 하는 가정들, 시민운동하는 인사들이 요청하면, 운동장과 회의실 등을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교회 시설을 전반적으로 정비했고, 대학교회에서는 바로크 오르간을 설치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삼애교회 처음 취임할 때 출석교인이 40명 정도였는데, 2년 후 그만둘 때는 100명 이상이 출석했습니다. 대학교회 처음 취임할 때 출석 교인이 300명이 되지 않았는데, 3년 후 그만둘 때는 420여 명의 교인이 출석했습니다. 교회 성장을 목적으로 목회한 것이 아닌데도 교인들이 증가했고, 교인들의 소속감과 행복도가 높았던 것이 감사했습니다. 교육자와 연구자로서 붙잡고 살았던 말씀은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빌 2:5)였습니다.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 하는 ‘진리의 마음’,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사랑의 마음’, 악까지라도 선으로 이기고 포용하는 ‘포용의 큰마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감당하는 ‘겸손의 마음’을 담아서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3. 봉사자로서의 활동
이제 봉사자로서의 활동을 돌아보겠습니다.
첫째는 학회 활동입니다. 한국기독교윤리학회에서는 학기 중 월례세미나를 최초로 신설해서 지금까지 이어 오도록 했고, 기독교윤리학자 학술정보집을 책으로 제작해서 학자들 간의 관심과 비판의식을 고양했습니다. 한국기독교사회윤리학회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기독교사회윤리’ 학회지를 활성화했습니다. 한국기독교대학교목회에서는 교목의 정체성을 강화하며 회원 학교들 간에 정보를 공유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고, 학회지인 ‘대학과 선교’를 활성화했습니다.
둘째는 시민사회 운동입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넘어서 교계 내의 평화통일 담론 형성에 공헌하는 평화와통일을위한연대를 창립했고 초대 사무총장으로 봉사했습니다. 지금은 법인의 이사이자 공동대표로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나무심기 관련해서 지원사업을 하는 ‘One Green Korea Movement’(OGKM)에서 법인 이사로 활동하고 있고, 최근 윤석열 정권의 탄핵과 파면을 위해 만들어진 ‘민주사회를 위한 지식인 종교인 네트워크’(민사네)에서 포럼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민사네는 윤석열 폭정종식을 위해서 활동한 지난 3년을 정리해서 [정의실천]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셋째는 한국 교계에서의 활동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사회전문위원으로서 사회백서를 집필해 총회의 공식문서로 채택하도록 했고, 인권과 평화통일 자료집 출판을 위해서 집필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2025년 1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의 개혁과 사회 대전환을 위해 만들어진 ‘예장대전환’ 모임에서 신학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공교회 기관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는 ‘신학위원회’ 위원과 ‘교회와 사회 위원회’ 위원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2024년 가을 이래로 윤석열의 폭정을 종식하기 위한 그리스도인 모임에서는 시국논평 위원장으로서 매주 시국논평과 몇 번의 성명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2025년 3월, 분열과 갈등 속에 침몰하는 한국교회와 사회를 직시하며, 개혁 성향을 지닌 30여 명의 신학자가 초교파적인 연대와 협력 속에 창립한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에서 대표가 되었습니다. 6월 이래로 2주마다 6,000명 이상 읽는 시사 칼럼을 회원들이 작성해 공유하고 있습니다. 향후 한국교회와 일반 신학교가 다루기 어려운 주제들 중심으로 분기별로 정기포럼을 개최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넷째는 언론 활동입니다. ‘한국기독공보’와 ‘가스펠투데이’에서 논설위원으로, ‘목회자신문’, ‘에큐메니안’, ‘겨자씨신문’, ‘평통연대 평화칼럼’ 등에서는 칼럼니스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방송(CBS)에서는 2년 남짓 시사 논평자로서 활동했고, CBS와 CTS 방송에서는 평화통일, 동성애 등의 주제로 토론할 때 몇 차례 참여했고, CBS의 ‘새롭게 하소서’ 프로에는 게스트로 출연했습니다.
봉사자로서 붙잡았던 말씀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유대 사람에게도, 그리스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교회에도,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 나도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추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고전 10:32-11:1)
4. 분에 넘치는 사랑에 대한 감사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많은 분의 관심과 도움, 사랑이 있었습니다. 제가 신앙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하심과 도우심은 언제나 저의 기대하는 이상이었습니다. 주고 또 주고도 더 주시려는 부모님의 내리사랑은 부모가 된 제가 흉내낼 수 없는 큰사랑이었습니다. 아내의 지혜로운 내조를 비롯한 자녀들의 도움, 가족 간의 사랑은 저의 열정적인 삶의 진정한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친구들의 우정과 동지들의 관심과 연대, 학교 교직원들의 아낌없는 지지와 협력은 혼자로는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 한 원천이었습니다. 부족한 사람에게 베풀어진 사랑의 총량이 너무 커서, 후반부 인생에서는 사랑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5. 지금까지 붙잡았고 앞으로도 계속 붙잡을 삶의 화두(話頭)
끝으로, 지금까지 붙잡았고 앞으로도 계속 붙잡고 살 삶의 화두(話頭)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인간(人間)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너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소중한 인간이고, 우리뿐만 아니라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소중한 인간입니다. 나만 소중한 인간이고, 너는 소중한 인간이 아니라고 할 때, 우리만 소중한 인간이고, 그들은 소중한 인간이 아니라고 할 때,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모든 인간은 성별, 인종, 국적, 계급 등을 초월해서, 하나님처럼 존엄한 존재로 위도 없고, 아래도 없는 평등한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경천애인(敬天愛人)입니다.
한자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지만, 기독교에서는 율법과 예언자의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의미합니다. 경천애인은 저희 가정의 가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두 개의 다른 영역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이웃 사랑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정체성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행함의 관계성 가운데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생활신앙(生活信仰)입니다.
대다수 교인에게 신앙생활이란 많은 생활 영역 가운데 추가된 또 하나의 생활 영역처럼 취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리될 때 기독교 신앙은 다른 모든 생활 영역에서 추방되고, 자기만의 영역 안에 이분법적으로 갇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가정이든, 일터이든, 공공영역이든, 세계 공동체이든 기독교 신앙인이 처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유감없이 꽃피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 신앙인은 생활신앙인으로서 신앙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궁극적인 방향이 되어야 하고, 인간의 삶 전체를 추동하는 근원적인 힘이 되어야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천지인의 조화(天地人調和) 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동료 인간 앞에서 협력자로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연을 잘 관리함으로 함께 공존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인간은 서로 책임을 회피하며 자연의 지배를 받는 주객전도된 존재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한 예수처럼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며, 탄식하는 피조물을 구원하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억강부약, 대동세상(抑强扶弱, 大同世上)입니다. 함께 어우러져 살고, 함께 기회를 누리며 살자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11장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기도 합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않는 세상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서 25장에 기록된 지극히 작은 자들, 가난하고 병들고 옥에 갇히고 차별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주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은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실대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에 임하도록 공동체적인 삶을 일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처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마6:33) 예수의 말씀을 붙들고 살려고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 위에서 경천애인의 마음을 담아서 생활신앙인으로 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천지인의 조화를 도모하며,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도구로 살기 위해서 전심전력할 것입니다. 저는 “하늘 아래, 땅 위에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 것입니다.
언제나 부족한 사람을 사랑해 주시고,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고, 기도로 지원하며 크게 기대해 주시는 모든 분께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늘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