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빌립보서 2:1-5) 신학대학원 원우 여러분, 반갑습니다. 채플을 통해서 여러분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빌립보서 2:1-5)
아신대 신학대학원 원우 여러분, 반갑습니다.
채플을 통해서 여러분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학업 위에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행동의 결과는 달라집니다.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개 하루 일할 양을 할당받는다고 합니다. 일을 부지런히 끝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일을 끝내고 쉬지만, 대충 때우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사람들은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하면서 다 끝내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어린 학생들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책상에 자발적으로 앉은 학생들은 짧은 시간이라도 효율적으로 공부하며 좋은 결과를 거둡니다. 하지만, 부모의 눈치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책상에 앉은 학생들은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헛수고일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과 행동은 밀접합니다. 어떤 마음을 지니느냐가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법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때 주님이란 말은 무겁고 진지한 말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종임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것을 멈추고,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ㅅ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다면, 저는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아 사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이 시간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분의 마음을 담은 기독교인으로 살기 위해서, 예수 자신의 가르침과 삶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마태복음 5:33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거짓 맹세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여기서 지나치는 것은 악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른 것을 옳다고 보증하기 위해서, 반대로 옳은 것을 그르다고 보증하기 위해서 맹세라는 미명 아래 거짓되게 살았습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그것은 악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안일과 부귀영화를 위해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의도적으로 왜곡했을 때, 수많은 사람이 고난에 빠졌던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평화시장에서 재단사 보조로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한 청년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그는 동료 노동자들의 아픔을 함께하며 개인적으로 동정해 보지만, 한계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노동법을 배워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선하고자 법적인 노력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권위를 위해 일한다는 노동청이 기업주의 하수인이고, 민주국가의 노동법이란 장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을 가르치는 한편, 노동자들의 상황을 사회와 일반 국민에게 알리고자 시위합니다. 그러나 언론은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몸을 살라 노동자들의 상황을 극명하게라도 알리겠다고 결심합니다. 영화는 청년 전태일이 자기 몸에 신나를 뿌리고 라이터를 당기는 것을 절정으로 합니다. 왜 청년 전태일은 자기 몸을 불태울 수밖에 없었을까요? 제3공화국 군사정권의 억압과 성장 이데올로기에 지식인과 언론이 침묵으로 동조하거나 예라고 선전할 때, 그는 피 토하며 죽어가는 동료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며 ‘이것은 아니오’라고 외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 하셨던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대의 권력자요 기득권자들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속은 무덤 안의 해골처럼 악한 마음과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찼으면서 겉으로만 경건한 척하는 회칠한 무덤들아” 호칭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모의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악한 사람들아,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되었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위선이라고, 성경과 예언자들이 가르친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 기회도 없어.”라고 말씀하시며 당시 지도층 인사들에 대해서 ‘아니오’를 단호히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빌미를 찾기 위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묻는 자들 앞에서 “나는 당신들 말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오.” 말씀하시며,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셨습니다. 결국 이러한 인정이 그를 신성 모독의 죄로 십자가에서 죽게 했습니다. 당시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들이닥칠 비참한 죽음의 고난을 예견하셨기에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기도하셨지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번복하시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아들로서의 자기 사명에 예라는 긍정을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가감 없이 증거하는 진리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기준 아래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합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이루는 일이라면, 예도 아니오로, 아니오도 예로 쉽게 둔갑시키는 것이 죄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입니다. 캐나다로 이민 가시던 음악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고,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말하며 살아라.” 그때 저는 아름다운 꽃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시궁창의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문하며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군대생활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가감없이 전하셨고, 진리를 선포하신 것으로 인해 죽으셨으며, 그 결과 영원한 진리 자체가 되신 분입니다.
둘째로, 누가복음 7장 31절 이하에서 예수께서는 그 시대 사람들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완악한 사람들”이라 비유하십니다. 이 비유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점잖은 비유로 들립니다. 예수께서 이ㅅ 비유를 다시 말씀하신다면, “너희는 피리를 불 때 춤추지는 못할망정 애곡하고, 애곡을 할 때 울지는 못할망정 춤추는 악한 사람들”이라고 수정하셔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해도 울지 않는 사람은 감정에 쏠리지 않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사촌이 땅을 샀을 때 진정 축하하고 함께 기뻐하기보다는 땅을 사지 못한 자신의 현실과 비교하며, 시기하고 질투하는 우리 인간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것 참, 고소하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다.”라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계획한 일이 잘되지 않아서 마음 아파할 때,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며 위로하기보다는 은근히 기뻐하고 즐기는 우리의 간사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죄된 인간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기뻐하는 자와 더불어 기뻐하시고, 우는 자와 더불어 우셨던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은 예수께서 베푸신 첫 번째 기적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청춘남녀가 결혼하고 피로연을 베풀었습니다. 모두가 축하하며 기쁨을 나눕니다. 피로연이 막 무르익었는데 준비된 포도주가 동이 났습니다. 피로연을 주최한 사람들이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 할 때, 예수께서는 나 몰라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의 흥이 깨지지 않도록 물을 가지고 맛이 좋은 최고의 포도주를 제공하셨습니다.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은 기뻐하는 자와 더불어 기뻐하신 예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11장은 죽은 나사로를 예수께서 살리신 기적을 담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대단한 기적입니다. 그러나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인간을 흙으로 빚어 창조하신 하나님, 그분의 아들이 죽은 인간 하나 살리신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이 본문에서 진짜 보아야 할 것은 오빠를 잃고 슬퍼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 심히 우셨다는 대목입니다. 까뮈의 소설 ‘이방인’이란 작품을 보면,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일상성 속에서 나른해 하는 한 사나이가 등장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무감각합니다. 우는 것이 뭡니까? 번거로운 일 하나가 터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 능력으로 그냥 살리시면 될 것을 마르다, 마리아 두 자매와 함께 우신 후에 살리셨습니다. 우는 자와 더불어 우셨던 예수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사랑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병든 자를 만나셨을 때는, 병 때문에 고통당하고 애달파하는 병든 자의 마음이 됩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혔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여인을 만나셨을 때는, 살려고 지푸라기라도 붙잡아 보려는 여인의 심정이 됩니다. 누구도 상대하지 않았던 세리장 삭개오를 만나셨을 때는, 자신을 이해해 줄 진정한 친구를 간절히 바라는 삭개오의 심정이 됩니다. 상대와 자신을 동일화하신 예수의 사랑의 마음은 병든 자의 병을 고치고,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고 의기양양했던 강퍅한 인간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돈밖에 모르는 삭개오가 자기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어놓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기적은 불가사의한 어떤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감동의 사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마태복음 5장 38절 이하에서 예수께서는 모세율법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께서 약자의 윤리를 가르친 것처럼 들립니다. “약자가 강자 앞에서 별수 있겠어? 생명이라도 유지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지.”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쥐새끼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벼들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것이 세상만사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눈은 눈, 이는 이의 보복의 원리’는 폭력의 악순환을 부추깁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오른뺨을 때렸다고 해서 나도 다른 사람의 오른뺨을 때리려 한다면, 인간 세상은 폭력의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먼저 폭력을 멈추어야 합니다. “당신이 먼저 폭력을 멈추시오.” 요구하기 전에, 이미 자행된 폭력을 내가 감수함으로써 그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폭력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까지 갖다 대었던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부인하고 옛 직업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원래의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스승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있던 베드로를 예수께서는 찾아가 당신을 향한 사랑을 상기시키시고, 삶의 의미와 방향을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당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해서, 죽음의 자리에서 비방하고 비웃는 사람들을 향해서, 창으로 허리를 찌르고 당신의 옷을 제비로 뽑는 군인들을 향해서 저주를 간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용서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를 알지 못합니다.”(눅 23: 34)
이제 우리는 예수의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모든 사람의 선을 도모하는 포용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지금도 죄악 가운데 사는 우리를 인내로 포용하십니다. 우리가 정욕과 이기심으로 살지라도, 예수께서는 우리가 부끄러운 삶을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지만, 우리가 그것을 싸구려 물건처럼 여길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것을 학수고대하고 계십니다.
헌터(Hunter)라는 신학자는 삶의 패턴(A Pattern for life)이란 저서에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첫째는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갚는 인간의 방식이고, 둘째는 선을 악으로 갚는 악마의 방식이며, 셋째는 악을 선으로 갚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예수처럼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도 용서하고 포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여, 주여, 외치는 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진정한 평화를 만드는 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지금 여기에서 하늘나라를 미리 경험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끝으로, 마태복음 6장 3절 이하에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을 돕고 구제한 것을 굉장한 일을 한 듯이 떠벌리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이웃을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히 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웃을 돕고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고, 살맛 나게 합니다. 그러나 이름 석 자 남기는 것이 무슨 굉장한 일인 양 어떻게 해서라도 이름을 알려야 하겠다는 신념으로 택시 기사를 하면서 강간살인 분야의 최고가 되고자 했던 온보현이란 악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여러 명의 여성을 강간살인하고 경찰에 잡혔을 때, 기자들에게 물었던 것은 “자신의 이야기가 신문 몇 면에 어느 정도 분량으로 다루어졌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강간 살인범의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영국에 ‘아핑검 스쿨’이라는 명문학교가 있습니다. 이 학교는 설립 이래로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아핑검 스쿨 출신으로서 장관이 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아핑검 스쿨 출신으로서 장군이 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아핑검 스쿨 출신으로서 백만장자가 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우리의 상식으로 이것이 자랑일 수 있습니까? 이 학교의 교육 목표는 “평범한 인간, 훌륭한 아버지, 선량한 시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위인전의 인물들처럼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이름 없이 이웃을 봉사하고 섬기는 삶도 참으로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살고자 하셨던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병자를 고치신 후 한결같이 당신이 치료한 사실을 감추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제사장에게 보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는 감추고, 하나님만 드러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신앙인의 삶의 자세여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함께하시던 저녁에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아내가 남편을, 종이 주인을 섬기던 사회에서 스승이신 예수께서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분은 섬김의 삶을 가르치기 위해서 죽음 앞에서까지 제자들을 섬기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높은 데 관심을 두지 않고 낮은 데 관심을 두는 겸손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났다, 내가 최고다, 당신은 나보다 못났다.”라는 생각을 떨쳐버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누가 보아도 자랑할 것이 많은데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것이 겸손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오히려 다른 이를 섬기는 것이 겸손입니다. 다른 이를 나보다 낫다고 높이 받드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낮아짐으로 인간은 높아졌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비천하게 죽으신 것이 온 인류를 풍요로운 생명의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낮아짐이 있는 곳에 막힌 대화가 술술 풀리고, 낮아짐이 있는 곳에 미움과 갈등이 해소되며, 낮아짐이 있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생겨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남의 발을 서로 씻어야 한다.”(요 13:12-15)
채플에 참석하신 신학대학원 원우 여러분, 그동안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까, 아니면 이기심과 탐욕, 교만과 죄로 가득한 마음이었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게 살았습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예와 아니오를 임의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자그마한 일에도 분을 품고 혈기를 부렸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자기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가 나의 주인 되도록 나의 죄된 마음을 비운다면, 그리고 그 빈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죄된 삶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의롭다는 인정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멋지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진리의 마음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고 동일화하는 사랑의 마음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베푼 사랑을 배은망덕하게 응답하는 사람일지라도 용서하는 포용의 큰마음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높이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겸손한 마음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의 길을 가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마음을 담아서 살고자 할 때,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우리의 학교와 세상이 우리를 통해서 진정한 희망과 기쁨을 발견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걸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 우리 모두 자신의 죄된 마음을 비우고,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아, 진정한 목회자로서 빛을 발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 정종훈 목사 (연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