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장 ~ 14장 묵상

삼상 1:1-8 엘가나와 두 아내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잘못 놓인 그릇에는 물이 담길 수 없고 가랑비가 내려도 제대로 놓인 그릇에는 물이 고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의 마음의 그릇이 제대로 놓여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서 감사라는 말처럼 아름답고 귀한 말은 없습니다. 예배하는 가정, 기도하는 가정은 제대로 놓인 그릇처럼 은혜의 강물이 쉼 없이 흘러넘치듯이 우리의 삶 속에도 감사가 절로 넘쳐 납니다.(김충산)
삼상 1:9-20 한나의 기도와 사무엘의 출생
우리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봄, 합격, 선물...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바로 “고백”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누군가의 솔직한 마음을 듣는 일처럼 우리의 마음을 만지는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한나의 간절한 기도처럼 우리의 힘든 상황을 고백하기를 바라고, 마음속 사랑의 고백을 기다리시는 분이 또 계십니다. 지금 이시간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나를 꼭 안아주시는 분께 진실된 나의 고백을 드립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김충산)
삼상 1:21-28 헌아 된 사무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늘 부하게 되기를 바라고 그것을 향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어떠한 형편에 서 있든지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에게 물질적인 풍요나 뛰어난 학식이 없다 할지라도 나에게 능력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기도하며 노력한다면 한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즐거움의 고백처럼 우리에게도 모든 것을 더해 주실 줄 믿습니다.(김충산)
삼상 2:1-11 한나의 노래
아론과 엘리, 또 위대한 사사이자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의 아들들이 타락하고 부패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실망과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부모가 신앙으로 바로 서서 자녀에게 말씀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통해 신앙의 길을 가르치고 보여주는 것이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부모가 먼저 믿음의 터 위에 서서 자녀들이 주 안에서 잘 자라도록 기도하고, 축복하고,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김충산)
삼상 2:12-17 패역한 엘리의 아들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미 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이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둘째는 개미 같은 사람입니다. 열심히 일하며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웃을 위할 줄은 모릅니다. 셋째는 꿀벌과 같은 사람입니다. 꿀벌은 이 꽃 저 꽃으로 분주히 다니면서 희생과 봉사로 꿀통에 꿀을 채우고 꽃들에겐 열매를, 사람들에게는 꿀을 공급합니다.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리도 남에게 유익을 주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갑시다.(김충산)
삼상 2:18-26 사무엘과 엘리의 아들들
아버지 서랍에서 50펜스(약 1,000원)를 훔쳐 사탕가게로 달려갔습니다. 가게 주인아저씨는 ‘이 돈 아빠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가져온 것이지?’라고 묻더니 아이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는 ‘그 돈은 제가 방금 준 겁니다. 우리 아들은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뜻밖의 용서를 받은 아들은 사탕을 내려놓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최고의 경영자가 된 영국의 버진그룹 회장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달려갈만한 감격과 기쁨, 실수를 저지른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성숙함이 우리 안에 있어야겠습니다.(김충산)
삼상 2:27-36 엘리 가문의 몰락 예고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사람은 그의 지성, 감정, 의지가 모두 길들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의 존재가 하나님께 길들임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이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조건 믿을 때 이것이 진정한 온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므로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다가와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길들임을 잘 받아 지적으로, 정적으로, 의지적으로 온유한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다 누리기를 원합니다.(김충산)
삼상 3:1-9 사무엘이 부름을 받다
나이가 들면 이 세상을 마감할 때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대부분이 많건 적건 남겨진 재산을 우선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앙의 유산을 남겨야 함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실감하지를 못합니다. 믿는 부모가 그 어떤 재산보다도 소중한 신앙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못한다면 삶의 실패요 불행임을 엘리 제사장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의 가정이 영적 중심의 삶이 되지못할 때 실패가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녀들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이 시급한 때임을 깨닫게 합니다.(차춘현)
삼상 3:10-21 엘리 가문의 멸망
우리가 진정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볼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시간의 속도에 항상 무언가에 쫓겨서 사는 서두르는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 ‘서두르는 삶’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막연한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다 깊이 인식하면서 살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의 교훈을 깊이 새겨야겠습니다.(차춘현)
삼상 4:1-11 블레셋에 패한 이스라엘
변화와 혁신은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많이 보고 듣고 생각을 한다고 해도 결국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어떤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어떻게 실행 할 것인가 는 일을 이루어 나가는 키가 됩니다. 구체적인 좋은 방법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실행을 용이하게 합니다. 먼저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구한 후 아이디어를 찾아야겠습니다. 시작 단계에서 멈춰버린 일들은 아마 어려움 앞에 포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차춘현)
삼상 4:12-22 엘리의 죽음
미국의 한 연구기관에서 약 천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가능하면 언제 죽는지 알고 싶은가”라는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96%의 응답자가 “알고 싶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옵니다. 죽음의 순간이 불과 수십 년, 수 년 내에 벌어질 사건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 준비를 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라는 톨스토이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찾아올 죽음의 준비를 말씀 속에서 찾아야겠습니다.(차춘현)
삼상 5:1-5 다곤 신당에 안치된 언약궤
고대의 문헌들을 보면 당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단순히 군사들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은 그들이 믿는 신들의 전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긴 나라는 그 나라의 신이 패배한 나라의 신을 이긴 것이라 여기고 상대국의 신상을 부수거나 빼앗으므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긴 블레셋의 신은 형편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궤 앞에서 엎드러졌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누가 참 신인지를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이계연)
삼상 5:6-12 언약궤로 인한 재앙
블레셋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에 이기려면 신들을 내 편으로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패하자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을 그들의 편으로 삼으려 한 것이고 여호와의 궤를 빼앗아 이스라엘의 하나님마저도 그들이 소유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신을 소유하거나 인간이 관리하여 둘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람보다 못한 신입니다. 참신앙은 신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있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 설 때에 승리하는 것입니다.(이계연)
삼상 6:1-9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블레셋
블레셋의 무너진 신은 사람이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신은 인간이 세우지 않으면 도저히 스스로 세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다곤은 신이 아닙니다. 신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궤는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손을 떠난 여호와의 궤는 혼자서 다곤을 무너뜨리고 가는 곳마다 블레셋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에 있었음에도 블레셋과의 전쟁에 패한것은 무력한 이스라엘 때문이지 하나님이 무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계연)
삼상 6:10-16 벧세메스로 향하는 언약궤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그저 인간들이 만든 조각에 불과하며 자신들에게 아무런 능력을 행할 수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정말 강하고 능력 있는 신이 누구인지 보았으며, 그 신의 재앙으로 큰 어려움을 당했음에도 믿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따르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멍에를 한 번도 메지 않던 암소 두 마리가 무거운 여호와의 궤와 제물을 들고 흐트러짐 없이 벧세마스로 향하는 것을 보면 정말 하나님의 능력에 찬양을 드리고 경배해야 할 법도 한데 돌이키지 않습니다.(이계연)
삼상 6:17-21 벧세메스 인들이 당한 재앙
여호와의 궤가 이동하면서 침묵하던 하나님이 먼저 블레셋에게 그리고 이제 레위인들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스스로 그의 위엄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는 금지된 영역에 대한 경솔한 호기심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블레셋에서의 소문을 분명 들었을 것인데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힘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제 멈추고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에서 할 수 있는 힘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이계연)
삼상 7:1-4 돌아온 언약궤
날이 갈수록 인간들은 기술 문명의 우수성과 자기들이 만든 것들의 정확성을 자랑합니다. 매우 정확한 첨단 제품이 나왔다 해도 곧 그것보다 나은 정교한 제품이 생산되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손을 거친 어느 것도 제로(zero)의 오차를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제로에 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가 정해놓으신 법칙은 영구불변하며 태초에 약속하신 사랑은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놓기까지 지키시는 무한한 사랑이란 신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신뢰도는 오차 제로(zero)입니다.(이준호)
삼상 7:5-11 미스바 대성회
알렉산더 대왕이 병영을 시찰하다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병사를 보고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알렉산더입니다 대왕은 재차 확인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알렉산더가 제 이름입니다.” 같은 대답을 듣고 난 알렉산더는 그 병사에게 말했습니다. “네 이름을 고치든지 알렉산더의 이름에 맞도록 너의 행동을 고치라.” 당신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지금도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 이름을 고치든지 네 이름에 맞도록 너의 행동을 고치라.”(이준호)
삼상 7:12-17 에벤에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꼭 한번 보기를 소원했습니다. 어느 날 그 소원이 이루어져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꿈속에 나타나셔서 내일 몇 시쯤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이윽고 약속한 시간이 되자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그 사람은 설레는 마음으로 나가 보았으나 문 앞에는 웬 거지 할머니만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화를 내며 할머니를 쫓아내었고 그날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꿈 속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약속 어긴 것을 항의하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약속한 시간에 너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문 앞에서 쫓아낸 것은 네가 아니냐?”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을 당신의 이웃과 나누세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이웃에게 한 것을 그리스도 자신에게 한 것으로 인정하십니다.(이준호)
삼상 8:1-9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운동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보면 참된 인내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경기장에서의 짧은 시간을 위해서 수 백, 수 천 배의 시간 동안 같은 행위들을 반복합니다. 만약 그들이 일정기간 이상을 쉬게 되면 운동기능이 둔해져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도 연습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 시험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짧은 기간의 시험과 환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쉴새 없이 육체와 영혼을 복종시키는 훈련이 필요합니다.(이준호)
삼상 8:10-18 왕정제도를 설명하는 사무엘
시설이 좋기로 유명한 고아원에 누더기를 걸친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는 대뜸 고아원 원장을 찾아가서는 여기서 살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원장은 즉시 원생으로 받고는 새 옷을 갈아입혔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한 후원자가 물었습니다. “아니 원장님! 저 아이가 어떤 아이인줄알고 무조건 받으십니까?” 원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의 모습이 충분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던가요?”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백성이 되는 데는 거창한 이력도 유력한 사람의 추천서도 소용이 없습니다. 있는 그래도 우리의 더러움을 자백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그 순간, 죄로 얼룩지고 상한 심령 그대로 주님께서는 기뻐 받으십니다.(이준호)
삼상 8:19-22 세속적인 왕을 구하는 백성
위대한 과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은 “인생의 거의 모든 질병이 간단한 원인에서 생기나니, 즉 우리가 방안에 고요히 앉아 있지 못하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시간을 갖지 않는 생활에는 많은 문제와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가 고요한 중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면 어찌될까요? 우리의 공포는 하나님의 고요함 속에서 안정을 찾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우리가 주를 기다리고 있사오니 아침마다 우리의 힘센 팔이 되사 절망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 할 때 그는 우리의 힘센 팔이 되시며 구원해주실 것입니다.(이준호)
삼상 9:1-5 사울의 가문과 인물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지파들이 왕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을 하신 뒤 왕이 될 인물을 지명하셨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기스의 아들 사울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한 사람이 이러한 영광을 얻은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유다와 에브라임은 그 사이에 베냐민을 끼고 있는 우세한 양 지파였습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한 사람이 선택 되었다는 사실은 통일의 필요성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과제, 즉 이 두 지파의 상호 시기심을 방지할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키가 크고 놀라운 용모를 갖춘 사람으로 이스라엘 중에 아무도 ‘그 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다는 인물이었습니다.(이지현)
삼상 9:6-10 사환의 조언
부름 받기 전 사울의 모습은 분명히 비천한 인품이었습니다. 그의 하인으로부터 여러 번 종용받고 난 후에야 잃어버린 암나귀에 대해 라마에 있는 선지자 사무엘의 충고를 구하게 된 것을 보면 그는 소심한 인간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사실은 그가 잃어버린 동물의 위치를 사무엘이 먼저 말 한 후였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통치자가 된다는 영광의 상징으로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이지현)
삼상 9:11-17 사무엘을 찾아간 사울
그의 일반적 연대는 주전 1060년 사울이 집권을 시작하기 전에 그의 아들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활동할 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로서 결정되었습니다. 사무엘 그는 사사 이상의 역할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정되었듯이 선지자였으며 제사장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어려운 시기에 중대한 필요를 채워 주었으며 종교적인 악습을 고쳐주고 국가적인 사기를 유지시켜주며 하나님 안에서의 신앙의 복귀를 촉진하여 나아가 새로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는 인물이었습니다.(이지현)
삼상 9:18-27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
이스라엘의 역사는 일곱 개의 시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부터 열 두 아들에 이르기까지의 족장시기. 둘째, 야곱이 애굽으로 갈 때부터 출애굽까지의 애굽시기. 셋째, 광야 시대와 팔레스틴 정복시기. 넷째, 하나님을 믿는 보편 신앙, 조상들의 유산과 실로의 중앙 성소에 의해 통합된 전혀 다른 실제로서 살았던 사사시대. 다섯째, 사울로부터 솔로몬까지의 단일 왕국 시대. 여섯 째, 분할왕국 시대 -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사마리아의 멸망으로 유대는 주전 568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일곱 째, 4세기까지의 포로시대와 포로이후 시대입니다.(이지현)
삼상 10:1-8 사울에게 미칠 세 가지 징조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청년들에게 강의한 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 한 청년이 한국엔 위대한 인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며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 시대를 이끌만한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빨리 계몽되어서 민족을 이끌고 일깨울만한 지도자가 어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안창호 선생은 정색하며 말했습니다. “자네는 정말 우리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자네를 비롯한 모든 청년들이 인물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네. 자네는 민족을 이끌만한 인물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가? 인물이 없음을 불평만 하고, 인물이 되려고 노력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인물이 없다고 탄식하기 전에 먼저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게.”(승현옥)
삼상 10:9-16 신에 접한 사울
두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젊은 나무꾼은 마치 힘자랑이라도 하듯 쉬지 않고 나무를 베었고, 나이가 지긋한 나무꾼은 짬짬이 쉬면서 나무를 베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베 놓은 나무를 비교하던 젊은 나무꾼은 놀랐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나무가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노인의 나무가 훨씬 많았기 때문입니다. 젊은 나무꾼이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분명 제가 어르신보다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베었는데 어떻게 더 많은 나무를 벨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자네는 오늘 하루 쉴 새 없이 도끼질을 했지만, 나는 잠시 쉴 때 무뎌진 도끼날을 다시 세웠기 때문이라네.”(승현옥)
삼상 10:17-27 왕이 된 사울
제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에 참전하여 죽었습니다. 각 지방의 젊은이들이 징집영장을 받으면 큰 도시로 집결해서 밤늦게 야간열차를 타고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그 때문에 워싱턴의 기차역에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들 때면 시민들이 나와서 이들에게 차를 대접하며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민들 가운데 밤늦게까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봉사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절뚝거리는 다리로 따뜻한 차를 들고 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대접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노인을 알아보고 놀랐습니다. 자신에게 따뜻한 차를 타주는 노인은 다름 아닌 루스벨트 대통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몸을 무릅쓰고 밤마다 기차 정거장에 나와서 전쟁터로 떠나는 젊은이들에게 차를 타주었던 것입니다.(승현옥)
삼상 11:1-8 암몬과의 전쟁
어느 마을에서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그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로 한 지휘자는 형편이 좋지 않아 전부터 입어오던 낡은 예복을 입고 지휘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휘자가 너무 열심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서인지 낡은 예복이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는 예복을 입어야 하지만 지휘자는 한 곡이 끝나자마자 낡아서 찢어진 예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셔츠 차림으로 지휘하는 그를 향해 관객들은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휘자는 주위가 소란해도 전혀 흔들림 없이 차분하게 최선을 다해 지휘했습니다. 그때 관객석 맨 앞에 앉아 있던 한 중년 남성이 조용히 일어나더니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고, 지휘자처럼 셔츠 차림으로 앉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관객들은 정적이 흐른 듯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둘 겉옷을 벗고, 셔츠 차림으로 오케스트라를 관람했습니다. 그날의 음악회는 지휘자와 관객이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한 감격스럽고 성공적인 공연이었습니다.(승현옥)
삼상 11:9-15 사울의 승리와 견고해진 왕권
세계 최대 부호인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뛰어난 두뇌로 세계적인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빌 게이츠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생각한 것처럼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재능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저는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으로 옮기고 그리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노력했을 뿐입니다.”(승현옥)
삼상 12:1-5 사무엘의 양심선언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권위적이고 부당한 간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처지나 유익에는 무관심하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거룩한 삶이나 순종이란 말들이 사라졌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말씀에 순종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지 못하고, 교인들도 성경 말씀이나 교회의 결정을 쉽게 무시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람과 자기희생으로 오늘도 통치하고 계십니다.(최양호)
삼상 12:6-13 이스라엘이 입은 하나님의 은혜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지나온 삶의 발자취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인정하며 살고 있는가? 당장 코앞에 닥친 어려움 때문에 그 동안의 수많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뒤돌아보면 모든 일이 합력해서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한 책입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최양호)
삼상 12:14-18 이스라엘의 배역을 경고하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십니까? 사회적인 악을 행하지 않거나 도덕적인 수준에서 짓는 죄가 없다고 안심하고 있습니까? 법적으로 처벌받을 일이 없거나 남과 싸울 일이 없으면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 만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 복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면 심각하고 큰 죄를 범하는 것이기에 심판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심판을 두려워하며 죄 짓는 것에 대해 경계하시기 바랍니다.(최양호)
삼상 12:19-25 백성에 대한 권면과 위로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 죄인을 구원하셔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를 범해 멸망의 길로 갔는데 왜 살리셔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죄인이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요,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주님은 신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으며 우리가 드리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최양호)
삼상 13:1-7 블레셋이 싸움을 걸다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모인 블레셋 사람의 숫자는 어마어마했습니다. 병거가 삼만이요, 기마대는 육천이며, 보병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부터 기가 질려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굴과 수풀, 바위틈이나 은밀한 곳으로 숨어버렸고, 어떤 사람들은 요단 강을 건너 도망갔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들도 두려움에 떨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에 의해 시작한 전쟁이 아닌, 사울이 시작한 전쟁이었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할만한 어떠한 제사도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다스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두려운 현실만이 보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근거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도성민)
삼상 13:8-14 사울의 범죄
현실의 다급함은 언제나 우리를 그럴듯한 명분으로 유혹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생활의 염려와 다급한 위기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릴만한 타당한 명분을 제공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만약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제사도 못 드렸고, 그 사이 백성들은 모두 떠나갔고, 거기에 블레셋의 삼만의 철병거와 육천의 기마대가 쳐들어왔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한줌 재와 같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우리의 어떤 상황도 하나님 앞에서는 핑계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성경은 이 모든 사실을 통해 사울에 대해 담담히 평가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험에서 탈락했을 뿐이라고..(도성민)
삼상 13:15-23 블레셋과의 전쟁준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가나안에 들어가 그 땅의 원주민들을 몰아내지 아니하면 그들이 너희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어 너희를 괴롭게 할 것(민 33:55)이라고 경고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과 통혼하며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제를 받게 되었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무기를 만들어 저항하지 못하도록 철을 다루는 철공을 없애거나 끌어가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었습니다. 재앙과 같은 지금의 현실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던 때로부터 기인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재앙과 같은 현실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지만 그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재앙이 어느 때, 어떤 불순종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지혜입니다.(도성민)
삼상 14:1-7 요나단이 믿음으로 출병하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무엘에게서 책망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서 떠나가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매달리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자복하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점이 다윗과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사라지고 인간의 사람 아히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자리를 대신한 것입니다. 비록 에봇을 입고 있었고 대제사장의 직함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도 그는 하나님이 세운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한 믿음으로 적진을 향한 요나단과 시종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시작되었습니다.(도성민)
삼상 14:8-15 요나단의 승리
사울은 재앙과 같은 환경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요나단은 두려운 현실을 보면서도 믿음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구원은 병력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며 단 두 명만으로 블레셋을 향해 돌진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옛적 사사들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계획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하고는 마치 맹수처럼 돌진하여 적군을 쓸어버립니다. 에봇을 입은 제사장은 사울과 함께 있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은 요나단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그것을 믿음으로 실천하는 자는 아무리 재앙과 같은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할지라도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옆에는 에봇을 입은 아히야가 함께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이 함께 계십니까?(도성민)
